한국오페라단장 박기현씨(36)는 요즘 눈코 뜰 새 없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얼마전 서울 서초동 현진빌딩에 마련한
"코페라홀"(연습장및 사무실)에서 하루 2~3시간 새우잠을 자기 일쑤다.

오는 11월7~1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작 "리골레토"공연을
앞두고 총책임자로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협찬기업 관계자를 만나고 연습진행 의상 무대장치제작등 공연준비상황을
점검하는 것뿐 아니라 각종 계약문건을 처리하고 초청인사를 선정하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씨와 조금만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얼마나 오페라에 빠져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창단8년을 맞은 한국오페라단을 국내 일급
공연단체로 성장시킬 수 있었으리라.

어릴 때 성악을 전공했던 어머니덕에 오페라공연을 볼 기회가 많았던
그가 어렴풋이 오페라제작의 꿈을 갖게 된 것은 14세때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오페라 "라 트라비타"를 보고나서.

공연자체보다는 극장과 공연분위기가 어린 소녀를 매료시켰다.

"우리나라에도 이같은 극장을 지어 극장장이 돼 훌륭한 음악가들을
불러들여 공연해야지"하는 야무진 꿈을 품는다.

"그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했고
소수상류층의 전유예술장르로 여겨졌어요.

성악 춤 연기 관현악 무대미술 의상등 모든 장르가 망라돼 사람들이
가장 쉽게 감동받을 수 있는 종합공연예술인 오페라를 사람들이
잘 모르고 접할 기회가 적은 것이 안타까웠고 한국오페라의 수준도
아쉽게 느껴졌어요"

어릴때부터 성악을 배웠고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온 그는 무대에 서는
꿈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오페라 "카르멘"의 카르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2학년때 편도선을 심하게 앓은 것이 오페라 제작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했다.

미국유학때 플로리다주립대학에서 정치광고학을 전공하면서 행정학
심리학등을 두루 공부하며 제작자로서의 역량을 쌓은 뒤 87년 귀국,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오페라단을 설립했다.

20대 미혼인 여자가 오페라를 만든다며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자
당시 음악계로서는 이 전례없던 일에 기대보다는 우려와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오페라단이 참신한 기획과 알찬 캐스팅으로 공연마다 화제를 뿌리며
성공을 거두자 지금은 유야무야 됐지만 박씨에 관한 좋지않은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정말 힘이 빠지고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제가 하는 일이 음악팬들과 사회와의 약속이라는 책임감이
들었고 수준높은 공연을 올리는 것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문제.

그동안 협찬을 받기위해 방문한 기업들이 500여곳에 이른다.

"80년대에는 대부분 기업들이 오페라뿐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인식이
한심한 수준이었어요.

문화지원은 간접홍보수단으로 최고라고 설득하고 오페라는 "노래가있는
연극"이라며 쉽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푸치니의 "나비부인"공연을 위해 한 기업에 협찬을 구하러 갔더니
담당책임자가 "푸치니란 일본작가가 쓴 작품에는 조금도 지원해 줄 수
없다"며 거의 내쫓기다시피 나왔던 적도 있다고.

아직 미혼인 그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며 사람을 못만났을 뿐"이라면서도
"애써 만든 공연의 막이 올랐을 때 옆에서 격려해주고 힘들 때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눌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송태형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