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라면 차우셰스쿠의 철권통치가 먼저 기억되는 나라다.

소련붕괴 이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권력을 휘두르다 피살된 독재자의
모습을 외신을 통해 접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헝가리 폴란드 등 인접 동구국가들에 비해 루마니아는 아직도 어둡고 긴
잠에서 덜 깨어난 분위기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프라호바주.

이곳에선 한국의 LG정보통신이 이 나라 통신망 현대화사업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기자가 2차선의 구불구불한 국도를 타고 스코르체니마을 관로매설작업
현장을 방문한 시간은 오후 4시.

보통 오후 3시만 되면 작업종료를 서두르는 것이 이나라 근로관습이지만
이곳 현장에는 아직 조금의 느슨함도 없다.

작업조장의 선창에 이어지는 구령도 신명난다.

LG가 불어넣은 한국식 작업방식이 이제 로마의 후손들이 세운 루마니아
벽촌에까지 열기로 전달되고 있다.

"예전엔 볼수없던 모습입니다.

이들도 이제 근로의 참 의미와 보람을 깨우쳐가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LG측 파견직원인 정상구씨(29)의 말이다.

공산주의식 작업체제에 젖어있던 근로자들이 이제 LG를 통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열기는 관로작업장에서만 볼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통신설비의 핵심인 전자교환기를 조립 생산하는 부쿠레슈티 LGEM
(LG정보통신과 루마니아 국영통신회사인 롬텔레콤의 합작사)도 마찬가지다.

공장이자 사무실이기도 한 이곳에선 현지 일류공과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LG측 기술자와 연구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다.

동구의 후발국 루마니아의 앞날이 결코 어둡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루마니아 정부나 통신업계가 LG정보통신에 거는 기대는 크다.

바꾸어 말하면 LG가 이 나라 정보통신산업에 기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라호바주내 "캄피나" "발레니" "미질" 등 3개 권역에서 LG는 최신
디지털형 통신망을 설치하고 있다.

총 규모 10만5,000회선.

94년 2월 루마니아측과 관련계약을 체결한 이래 이미 상당지역의 공사가
마무리돼 이제 프라호바주는 루마니아 40개주 가운데 가장 선진화된 통신
서비스를 제공받게 됐다.

전체 가구수가 3만에 채 못미치는 캄피나지역의 경우 LG가 1만2,000회선을
신규 개설, 가구당 전화보급률이 50%에 육박한다.

이 나라 평균보급률 13%에 비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LG가 공급하는 전전자교환기 성능도 기존 설치된 제품들에비해 통화질이
훨씬 좋다는 평가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신규 가입자들은 누구나 LG의 통신망 서비스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루마니아인 프로젝트 매니저인 용쿠소린씨(32)의 설명이다.

루마니아측은 또 LG의 과감한 기술이전 방침에 아주 고마워하고 있다.

줘도 될만한 기술을 이전함으로써 루마니아 통신기술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 크게 보면 이익이라는 것이 LG의 판단이다.

지금까지 이나라 통신사업은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카텔이 독점해 왔다.

이들은 철저한 기술보호주의를 고수, 하찮은 업무라도 기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루마니아인의 참여를 통제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연 루마니아측은 기술이전에 인색하지 않은 LG측에 무척 고마워하고
있다.

LG정보통신으로서도 이곳 통신현대화 사업에 참여한 의미는 작지않다.

우선은 지멘스 알카텔 양대세력의 틈새에 끼여든것 자체가 대견한 일이다.

통신사업이 첨단의 기술을 요구하는 만큼 후발국으로서 해외시장 거점을
확보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프라호바주에 대한 성공적 사업진행은 인근 주가 추진하는 관련사업에
대한 추가수주 가능성도 높여주고 있다.

실제로 알비율리아주의 3만3,000회선과 부조우주의 1만4,000회선에 대한
신규수주 협상이 지금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밖에도 루마니아에서 인정받은 기술력과 명성은 LG정보통신의 대외신뢰도
를 높일수있는 좋는 계기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LG가 루마니아에서 성공적으로 통신사업을 추진할수 있기까지에는
그 고초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수주과정에서는 기존 메이저기업들의 방해공작이 끈질겼다.

LG가 그나마 수주에 성공하게 된 것도 우리정부가 이 나라 통신망 현대화
사업을 위해 제공한 경협자금이 바탕이 됐다.

작업현장에 파견된 직원들이 겪는 고충도 이루 말할수 없었다.

수도 부쿠레슈티는 그래도 사정이 낫지만 지방 공사현장에 파견된 직원들은
먹는 것부터가 당장 문제였다.

"가장 동구적(?)인 이 나라의 시골에서 사먹을수 있는 음식이라곤 스파게티
뿐이었다"는 이상천과장(38)은 "그나마 비위에 잘 맞지 않아 남자직원들끼리
서울에서 가져온 쌀로 맨밥을 지어먹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근로자들의 작업태도도 문제였다.

오랫동안 공산주의 체제에서 생활해온 탓에 근로의욕이 낮았다.

책임지는 일은 아예 꺼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LG 직원들이 솔선수범해 열심히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제는 현지직원들 사이에서도 작업시간을 넘겨가며 급한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당연시 되게 됐다.

비록 힘들고 고달픈 현지생활이지만 루마니아 파견 LG직원들의 긍지는
대단하다.

한 나라의 통신시설 현대화작업에 핵심적으로 기여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냐는 것이다.

"회사의 발전과 대한민국의 긍지를 심는 일이라면 루마니아사업이 끝난뒤
다른 어떤 오지에서 불러도 다시 달려가겠다"는 이과장.

며칠뒤면 귀국한다는 그의 단호한 이 한마디에 지금 루마니아 벽촌에서
LG정신이 착실히 접목되고 있는 이유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 글 김기웅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