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겨울 비내리는 히드로 공항.

30대 초반의 한국인이 이제 막 도착한 브리티시 에어의 트랩을 내려섰다.

낯선 땅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의 이름은 김정웅(55).

남선물산 런던지사원이 그의 직함이었다.

그로부터 10년뒤. 런던 파크 애비뉴의 한 저택앞에 "부와 출세의 상징"
파란색 롤스로이스가 굴러와 섰다.

번호판에는 김정웅이라는 이름의 영문 이니셜 JWK가 선명하게 찍힌 채로.

뒷자석에는 최고급 샴페인 24병과 함께 롤스로이스사에서 보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우리회사의 신형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구입하신
최초의 한국인이 되셨습니다"

일개 무역상사 지사원으로 영국에 건너왔던 김정웅씨의 직함은 이제
에버락스(EVERAX)사 사장으로 바뀌었다.

재영한인회장과 평화통일 자문위원이라는 직함도 따라붙는다.

그는 76년 에버락스사를 세워 독립한 후 남다른 근성과 성실성으로 지금은
매출액 3,700만파운드의 회사로 키워냈다.

이 정도면 영국내 직물도매업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손이다.

특히 사람들은 영국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과 인도계 상인들의 상권을
뒤흔들며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한다.

사실 그의 성공은 어떤 면에선 "예정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모든 것이 미비한 악조건 아래서 런던에 도착
했지만 성공에 대한 의지와 함께 누구에게도 지고싶어 하지 않는 남다른
오기와 집념을 갖고 있었다.

에버락스라는 회사이름에도 그의 이런 근성이 배어있다.

에버(EVER)는 "영원히"라는 뜻이고 액스(AX)는 "도끼"라는 뜻을 가진
영어단어.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는 속담처럼 집념을 갖고 끈기있게 사업
하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 역시 런던에서의 생활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근무하던 무역회사에서 영국에 첫발을 디딘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우선 지사를 런던에 개설하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우선 가족을 조그만 여관에 머물게하고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알아보고 직원도 뽑고 할 일이 태산같았다.

4년간 미 군사고문단 통역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어 영어라면 자신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영국 영어는 또 달랐다.

미국식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몇번이고 되물어야 했다.

겨우겨우 사무실 임대계약을 맺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몸무게가 10 이상 줄어들었다.

모든 것이 안정되는데 3개월이 걸렸다.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품이라는 것은 정말 형편 없었다.

남방 바지 등 의류와 직물 가발이 고작이었다.

한국상품은 대부분 가난한 동네시장에서 팔리는 싸구려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영국 직물원단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태인과 인도계 상인들이 주로 사업을
하는 장소는 런던의 서부1지역과 동부1지역이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이 지역들을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우리 제품을 팔아 먹을 곳은 없었다.

우리 제품은 아프리카나 중동시장에 내다 팔아야 좋을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백화점에 가서 우리가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원단을
몇 야드 구입해 구매업자들을 찾아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섬유류 및 경공업 제품시장에서 인도 및 유태인들이 영국
상권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착안,김사장은 유태인이나 인도계 원단수입상들을 자주 찾아가서는
물건 팔 생각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
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그들과 가까워졌고 마침내 오더도 받게 됐다.

이후 이들로부터 꾸준한 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한번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35만달러짜리 오더를 받게 됐다.

우리나라는 외화가 부족한 때여서 외국에서 10만달러의 신용장이 은행에
도착하면 은행의 외환담당 부장이 직접 회사를 방문해 신용장을 전달할
정도였다.

김사장의 35만달러 신용장이 한국에 도착하자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부랴부랴 대구의 모든 직물생산공장을 뒤져 가장 고급제품을 생산하는
곳에서 물건을 조달해 보내왔다.

그런데 물건을 받아본 바이어들은 야단이었다.

45인치 원단을 주문했는데 왜 36인치 원단을 선적했느냐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본사에 연락해 보니 본사에서는 분명히 45인치 원단을 선적
했는데 운반도중 원단 폭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입상을 찾아가 솔직히 원인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바이어는 화를 풀고 36인치 가격으로 조정하는 안을 제시해서 문제를
해결지었다.

그들과의 친분이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이후 영국에서의 비즈니스는 별탈없이 진행됐다.

그가 받는 오더량도 꾸준히 증가해 회사에서는 그의 영업실적에 대해
대만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초 2년 기간으로 근무명령을 내려놓고는 영국에 온지
3년이 다돼도 회사에서 귀국발령을 내리지 않았다.

김사장은 불안했다.

"동료들은 모두 승진하고 있는데 나만 런던에 따로 남아있어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원단을 수입, 봉제공장에 팔면 큰 이익이 남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요. 이번 기회에 아예 런던에 정착해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해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김사장은 전 재산을 털어 평소 가깝게 지내던 M씨와 50대 50의 비율로
자본금 1만파운드를 투자해 에버락스사를 런던 근교에 차렸다.

직물원단 수입회사였다.

그는 원단을 직접 수입해 섬유제품 공장 등지로 뛰기 시작했다.

우선 평소 알고 지내던 국내 공급업자들에게 직접 원단비즈니스를 하게
됐음을 알리고 좋은 물건을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한 공급업자가 지금 미국 바이어에게 주문을 받아 생산해 놓은 제품이
있는데 그 바이어가 수입을 거부해서 엄청난 물량의 원단이 재고로 쌓여
있으니 구매 의사가 있으면 샘플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무심코 샘플을 본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아이템은 영국에서 당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원단이었다.

국내 수출공급자인 그는 김사장을 믿고 그저 물건을 보내줄테니 장사가
잘 되면 원단 값이나 보내달라는 말만 하면서 제품을 보내왔다.

당시 약 800만달러어치의 엄청난 물건을 아무 조건없이 공급받아서 장사를
하게된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으며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이후에도 원단 수입판매업은 많은 어려움을 만나야 했지만 그때마다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없다"는 그의 경영철학처럼 끈질긴 집념과 오기로 이를
극복해 왔다.

동업자와의 관계도 말썽이었다.

결국 서로 독립하기로 했다.

어려웠던 시절 같이 고락을 나누었던 동업자와의 결별은 큰 고통이었으나
서로의 발전을 위해 각자 다른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직물수입에서 성공한 김사장은 점차 사업영역을 넓혀 나갔다.

지금은 직물 원단을 수입해 단순히 판매하는 것보다 국내의 원단 반제품을
수입해 제3국에서 가공 수입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그밖에 부동산에도 투자해 교포사회 뿐 아니라 영국인들에게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영국 직물수입상에서 김사장은 신용을 잘 지키는 사업가로도 통하고 있다.

그는 교포들의 어려움을 돕는 데에도 인색치 않았던 덕분에 교포사회에서
신망을 얻어 지난해까지 재영한인회장을 지냈다.

또 현재는 평화통일 자문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주인될 자격이 없으면 팔지 않는다는 롤스로이스
승용차는 그가 가장 아끼는 "애마"다.

20년전 비내리는 히드로 공항에 두주먹만 쥐고 도착했던 한국의 세일즈맨
김정웅씨는 이제 영국의 메이저 직물공급자로서 자신의 이름과 "메이드 인
코리아" 원단의 명성을 널리 떨치고 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