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예부터 국가가 주요 도로변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이란
기관을 설치해 운영했다.

국가공문서와 군사정보 전달, 관물수송 사신영송 마필제공 등을 맡았던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다.

"삼국사기"에 487년 신라 소지왕이 사방에 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나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을 거쳐야한다는 기록을
보면 역제도는 이미 삼국시대에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때는 이 제도가 더욱 발달해 22개 도로에 252개의 역이 운영했고,
조선초기에는 40개의 도로에 536개의 역과 약 5,380필의 말이 소속돼
있었다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역제도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거의 마비돼 버린다.

우선 말값의 앙등으로 역마확보조차 어려웠다.

이항복이 "말은 나라에서 가장귀한 보배" (최귀국지보)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사정이 짐작된다.

게다가 말을 기르며 농사도 지어야했던 천민계급인 소속 역원들이
모두 달아났다.

역의 운영비가 나오던 역전도 사유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역로행정이 무너져 군사통신기관으로서의 이용이 어려워지자
기존의 역제도와 병행해 채택된 것이 파발제도다.

1597년 한준겸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파발"은 임란때 원군으로 와있던
명나라제도를 본뜬 것이었으나 인조때에 와서야 우리식의 파발제도로
완성된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파발제에는 전달수단에 따라 말을 타고 전송하는
기발과 사람이 속보로 전달하는 보발이 있다.

대개 20~30리마다 중간경유지인 참이 있어 말이나 사람을 바꾸어가며
기밀문서를 전하는 릴레이식 전송방법이다.

파발로는 의주 경흥 동래에서 한양까지 각각 서발 북발 남발로 불리는
3대로를 사용했다.

"대동지지"에는 참이 모두 213개였다고 기록돼 있다.

파발꾼은 기밀문서를 봉투에 넣어 봉하고 관인을 찍은 다음 다시
가죽주머니나 소뿔 (피각전송)에 넣어 몸에 지니고 달렸다.

일의 완급에 따라 방울을 달았는데, 초비상일때는 방울 3개, 2급일때는
두개, 3급일때는 한개의 방울을 달았다.

파발제가 완전히 폐지된 것이 18965년 (고종32) 우체사가 설치되면서
부터였으니 298년이나 이어져온 옛 통신수단이다.

서울 은평구가 31일 통일로에서 파발제를 재현한다는 소식이다.

은평구에는 옛날에 연서역이 있던 역말이 역촌동, 벽제관으로 통하는
파발의 역이 있던 곳이 구파발이란 동명으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외국에 있는 친지와도 전화다이얼만 돌리면 대화가 가능한
정보통신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파발마의 방울소리는 낭만적인
향수를 불러 일으킬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