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수표처럼 빛바랜
가을 하늘을 이고
광야에 서서 석양을 굽어보니
한발치 물러선 햇살이 황금 들판에
노을처럼 부서지면
대지는 어둠을
차곡히도 내려놓고
갈잎은 매양
황달기로 서러운데,

논머리 위로
풀꽃 성성하던
가을 들판을 불러 가슴을 적시면
새 한마리 반공을 오가고
휘진 방죽길 아래
발원지도 모르는 강물만
흐르는듯 쉬어 가는데,

내 -
산만한 눈빛은
무엇이 안타까워
돌아서지 못하고
어둠은 이미 시야를 뒤헝클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것도 남겨둔
흔적도 없어,

지친 배를 쓸며
돌아서야할 초미의
내가 거기 서 있는데
지다 남은 이파리는
바람에 떨어져 발치마다
바스락 거린다.

시집 "낙엽지는 창가에서"중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