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는 "백자의 시대"였다.

개국초부터 조정에서는 백자의 생산과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분청사기와 청자는 백자에 흡수되기 시작하고 16세기
후반에는 거의 백자일색이 된다.

"용재총화"에는 "세종때 어기는 백자를 전용했다"고 적혀있다.

"광해군일기"에도 "왕은 백자를 사용한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조선왕실에서는 개국초부터 후기까지 백자를 썼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물론 왕실에 납품되는 백자는 상품이었다.

상품백자란 좋은 태토와 유약만을 골라 그릇을 빚고 이를 갑에 넣어
구운 것으로 질과 형태와 색깔이 우수한 명품이었는데, 이런 백자를
"갑번"이라고 불렀다.

특히 관요의 중심이었던 광주의 분원요는 왕실에 납품하는 명품의
산실로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분원의 "갑번백자"를 사용해 보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19세기말 한국에 건너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고려청자뿐이었다.

호리꾼들은 개성근처의 왕릉들을 모조리 파헤쳐 청자를 도굴해갔다.

때문에 조선백자는 고려청자에 눌려 한때 천덕꾸러기 노릇을 해야했다.

그러나 1922년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 (류종열)가
백자찬양론을 펴면서 사정은 뒤바뀌었다.

고려청자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조선백자는 남성적인
"위엄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백자 찬양론의 골자다.

그후 일본인 수집가들의 관심은 백자에 쏠리기 시작한다.

호리꾼들의 말처럼 왕서방 (고려청자) 대신 이서방 (조선백자)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인들이 청자나 백자를 미처 "골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일본인들은 이처럼 한국의 도자명품을 싹 쓸어가 버렸다.

최근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17세기초 "백자철화문용항아리"가
756만달러 (약 63억원)에 낙찰돼 세계 도자기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일본인 소장가가 내놓은 이 항아리가 예상가를 무려 20배나 웃도는
가격에 낙찰됐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일제때 "청화백자 진사 철채 양각국화문병"을 경매에서 예상가의
20배가 넘는 엄청난 가격에 사들였다는 간송 전형필의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 쾌거다.

이 항아리를 사들인 사람이 간송처럼 한국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한국인이었으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다는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