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임수 <이화여대 교수 / 경제학>

지난 70년대 대한항공은 유럽 정기항공노선을 얻기위해 EU가 생산하는
에어버스 항공기를 계속 구매했다.

그 결과 오늘날 EU의 전지역에 한국 국적항공기의 모습을 볼수 있게
됐다.

경제적으로 높은 대가를 치르며 EU내에 떳떳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80년대에는 정치상황때문에 유럽과 한국의 협력관계가 소원해졌으나
이제 새로운 차원의 협력계기가 마련됐다.

그것은 지난달에 체결된 한국과 EU간의 기본협력협정 체결로 구체화되고
있다.

프랑스를 포함한 EU국가들은 경제적 파트너로서 한국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국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까지 치부하고 있다.

프랑스의 TGV와 방위산업, 독일의 자동차및 전기제품 등의 유럽형
첨단산업은 한국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사례이다.

이런 성취를 바탕으로 EU는 그들이 상대적으로 경쟁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통신및 금융분야도 개방하라고 꾸준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국과 EU간의 교역과 투자가 증대됨에 따라 한국의 대EU 무역역조는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EU의 한국에 대한 통상압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국내 주세율의 인하, 통신시장 확대개방, 한국산 가전제품에 대한
덤핑혐의 조사, 한국산 자동차에대한 견제, 그리고 한국자동차 시장의
구조적 개선요구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금융 보험 주식 등의 생산요소시장의 개방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협력이 확대됨에 따라 한국은 OECD가입이 가능해졌고 세계
분업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EU는 체제 전환과정에 있는 헝가리 체코 폴란드를 OECD에 가입시켰고,
슬로바키아도 곧 가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의 변방4개국을 모두 가입시켜 유럽우선정책을 표면화한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아시아 시장에서 안정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의 OECD가입을 적극 지원했다.

한국의 문민정부가 추구하는 세계화 정책과 잘 부합되는 것이다.

OECD가입은 궁극적으로 한국경제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국제화시킴으로써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가능토록 하는 것이다.

선진경제의 특징인 효율과 형평을 잘 갖춰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EU와 한국의 협력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EU로서도 한반도의 중요성은 여러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다.

기본협력협정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두 지역간의 교역과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경제협력을 기반으로 정치및 안보분야에 까지 협력을
확대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다.

한편 EU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침체와
대량실업을 포함한 심각한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EU는 독일통일후 동구시장의 확대와 활력을 기대했지만 여의치 않자
유럽의 장래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역동성을 띠고 있는 아시아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지난 3월 첫회합을 가진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회담으로
현실화됐다.

즉 APEC를 통해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제동을 걸려는 유럽연합의 노력이다.

ASEM의 표면적인 목적은 시장개방과 경제협력의 확대지만 아시아
지역에서의 외교와 안보분야에 있어 EU의 목소리를 높이겠다는 원대한
계산이 깔려있다.

같은 맥락에서 EU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이사국으로 적극
참여, 장래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여러가지 문제에서 그들의 몫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를 보였다.

마치 조선의 개화기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구열강들이 보였던 경쟁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 일본 EU 중국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첨예한
이해대립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다각적인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과의 협력은 한국이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 경제의존도를
탈피할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과 EU의 관계는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일본은 EU와 대등한 입장에서 정치 경제에 대한 정책조율을 해왔고
최근에는 독일 영국 프랑스와 개별국가적 차원에서 장관급회의를
정례화시키고 있다.

한국도 주체적으로 대EU협상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OECD에 대한 EU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국으로서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냉엄하고 현실적인
통찰이다.

특히 중동과 중동부 유럽이 대표적인 예인데 소련이 붕괴됨으로써
생겨난 힘의 공백중 상당부분을 EU가 메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팍스아메리카에 대한 EU의 도전으로도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정치구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

한국은 이런 움직임을 예의 주시,이해증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KEDO를 통해 EU가 하나의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옴에 따라 한반도
문제에 있어 EU는 이미 무시할수 없는 존재가 됐다.

따라서 한국은 우선 한반도에 대한 기존의 이해 당사국과 EU의 진출이
세력균형상 어떠한 변화를 유도할수 있는지 세심하게 연구해야 한다.

19세기 우리의 과오가 되풀이 돼서는 결코 안되기에 이러한 노력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