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직칼럼] 황새와 부엉이 .. <논설위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옛글에 "상유에 이르러."라는 표현이 있다.
저녁해가 뽕나무나 느릅나무위에 걸려있다는 뜻으로 인생이 노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붉게 타는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뽕나무 느릅나무는 해가
떨어지면 어둠속에 묻혀버릴 운명이다.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장엄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한없이 서글퍼
보이기도 하는 멋진 시적 표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노년기가 오지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앙드레 마르와의 표현을 빌리면 노년은 "거의 색깔이 바래지 않은
잎사귀 뒤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닥쳐온다.
결국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런 생리적 변화이고,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사람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젊음의 샘"은 아직 어느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대신 종자를 퍼뜨려 유한한 생명을 무한히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인간은 본능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자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다.
효란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여 감사하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생명에 대한 긍정"에서 생겨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효는 "참된 인간실현의 근본"(위인지본) "정치와
교화의 근원"(교지소유생)으로서 사회적인 모든 행위의 근원적인 원리였고
전통적 윤리체계의 초점이었다.
이처럼 효행이 사회적 윤리규범으로 확립되자 부모에 대한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 형식적으로 고정되고 관습화되는 부정적 측면도 생겼다.
그러나 이런 폐단은 효의 본질과는 엄격히 구별돼야 한다.
효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윤리다.
내몸을 내집안에 둔다면 위로는 천백세 조상의 결론이요, 아래로는
만억대 자손의 발단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효야 말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라는 것이 자명해 진다.
조선조 인조때의 학자 박지계는 효성이 남달랐다.
고향인 괴산에서 어머니가 여러해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에 잠이 오면 앉은채 목침으로 이마를 괴곤 했으므로 두 눈썹이 다
빠져버렸다.
구한말 영남 유종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사미헌 장복추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순하여 조금도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모친의 고질병환에 3년 묵은 쑥을 구해서 뜸질로 낫게 했고 노쇠하여
보행이 불가능해지자 어머니를 업고 돌아다니며 일일이 봄날의 경치를
설명했다고 한다.
모두 요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효행들이다.
이처럼 진실하게 효를 실천함으로써 효의 윤리가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의 풍속을 순화시켜 조선왕조가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최근 한 노인단체가 불효자를 법률로 제재하는 "효도법"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단체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자식에게 버림받거나 자식의 패륜범죄로
죽어가는 노인이 매년 30여명, 제주도 등지에 버려지는 노인이 8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효도라는 윤리적 행위가 과연 법률로 징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노인들 스스로 효도법제정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인들은 과거 전통사회의 문화는 세계에 자랑할 것이 많지만
과거로부터 축적된 문화양식으로서 현재사회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문화적
전통은 깡그리 잃어버렸다.
효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저돌적인 근대화, 일류만 찾는 맹목적 세계화가 안겨다준 정신적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가정까지 점점 현대 계약사회의 질서속에 휩쓸려 가족의 개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개인윤리의식이 마비됨에 따라 부모를 봉양하는 전통은
하루가 다르게 퇴조하고 있다.
더구나 현재 65세이상의 노인인구는 전체인구의 5.8%에 이르고 있고
앞으로 고령화비율은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정부의 노인문제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노인복지 예산은 매년 답보
상태다.
지금이야말로 가정교육 및 학교교육 등 사회교육을 통해 효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밤에만 나다니는 부엉이는 불효를 상징하는 새다.
8~9마리나 되는 새끼들이 어미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둔재
한담"에 전해오기 때문이다.
또 부엉이는 먹이를 닥치는 대로 물어다가 쌓아두는 습성때문에 횡재를
했을 때 "부엉이 집을 얻었다"고 하고 자신도 모르게 부쩍부쩍 느는 재물을
"부엉이 살림"이라고도 한다.
"불효새"인 부엉이와는 반대로 황새는 "효도새"다.
70년이라는 긴 수명을 누리면서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 짝을 보살핀다.
특히 젊은 황새들은 나이가 들거나 병든 부모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고
큰 날개로 보호하며 정성을 다한다.
그래서 고대 로마인들은 자녀가 나이 든 부모를 의무적으로 부양하도록
한 "황새법"을 만들었다.
그리스어로 "황새"를 뜻하는 "스토르게"라는 단어의 어원도 "강한 혈육의
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한국은 점점 부엉이들의 서식처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지면을 장식하는 불효나 패륜의 사례도 그렇지만 뇌물을 받아
"부엉이 살림"을 이룬 고위 공직자들의 비도덕성을 봐도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로마의 "황새법"과 같은 "효도법"이 다시 거론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6일자).
저녁해가 뽕나무나 느릅나무위에 걸려있다는 뜻으로 인생이 노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붉게 타는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뽕나무 느릅나무는 해가
떨어지면 어둠속에 묻혀버릴 운명이다.
그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장엄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한없이 서글퍼
보이기도 하는 멋진 시적 표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노년기가 오지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앙드레 마르와의 표현을 빌리면 노년은 "거의 색깔이 바래지 않은
잎사귀 뒤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닥쳐온다.
결국 늙는다는 것은 자연스런 생리적 변화이고,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사람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젊음의 샘"은 아직 어느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대신 종자를 퍼뜨려 유한한 생명을 무한히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인간은 본능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자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다.
효란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각하여 감사하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생명에 대한 긍정"에서 생겨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효는 "참된 인간실현의 근본"(위인지본) "정치와
교화의 근원"(교지소유생)으로서 사회적인 모든 행위의 근원적인 원리였고
전통적 윤리체계의 초점이었다.
이처럼 효행이 사회적 윤리규범으로 확립되자 부모에 대한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 형식적으로 고정되고 관습화되는 부정적 측면도 생겼다.
그러나 이런 폐단은 효의 본질과는 엄격히 구별돼야 한다.
효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윤리다.
내몸을 내집안에 둔다면 위로는 천백세 조상의 결론이요, 아래로는
만억대 자손의 발단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효야 말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라는 것이 자명해 진다.
조선조 인조때의 학자 박지계는 효성이 남달랐다.
고향인 괴산에서 어머니가 여러해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에 잠이 오면 앉은채 목침으로 이마를 괴곤 했으므로 두 눈썹이 다
빠져버렸다.
구한말 영남 유종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사미헌 장복추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순하여 조금도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모친의 고질병환에 3년 묵은 쑥을 구해서 뜸질로 낫게 했고 노쇠하여
보행이 불가능해지자 어머니를 업고 돌아다니며 일일이 봄날의 경치를
설명했다고 한다.
모두 요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효행들이다.
이처럼 진실하게 효를 실천함으로써 효의 윤리가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의 풍속을 순화시켜 조선왕조가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최근 한 노인단체가 불효자를 법률로 제재하는 "효도법"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단체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자식에게 버림받거나 자식의 패륜범죄로
죽어가는 노인이 매년 30여명, 제주도 등지에 버려지는 노인이 8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효도라는 윤리적 행위가 과연 법률로 징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노인들 스스로 효도법제정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인들은 과거 전통사회의 문화는 세계에 자랑할 것이 많지만
과거로부터 축적된 문화양식으로서 현재사회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문화적
전통은 깡그리 잃어버렸다.
효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저돌적인 근대화, 일류만 찾는 맹목적 세계화가 안겨다준 정신적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가정까지 점점 현대 계약사회의 질서속에 휩쓸려 가족의 개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개인윤리의식이 마비됨에 따라 부모를 봉양하는 전통은
하루가 다르게 퇴조하고 있다.
더구나 현재 65세이상의 노인인구는 전체인구의 5.8%에 이르고 있고
앞으로 고령화비율은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정부의 노인문제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노인복지 예산은 매년 답보
상태다.
지금이야말로 가정교육 및 학교교육 등 사회교육을 통해 효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밤에만 나다니는 부엉이는 불효를 상징하는 새다.
8~9마리나 되는 새끼들이 어미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둔재
한담"에 전해오기 때문이다.
또 부엉이는 먹이를 닥치는 대로 물어다가 쌓아두는 습성때문에 횡재를
했을 때 "부엉이 집을 얻었다"고 하고 자신도 모르게 부쩍부쩍 느는 재물을
"부엉이 살림"이라고도 한다.
"불효새"인 부엉이와는 반대로 황새는 "효도새"다.
70년이라는 긴 수명을 누리면서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 짝을 보살핀다.
특히 젊은 황새들은 나이가 들거나 병든 부모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고
큰 날개로 보호하며 정성을 다한다.
그래서 고대 로마인들은 자녀가 나이 든 부모를 의무적으로 부양하도록
한 "황새법"을 만들었다.
그리스어로 "황새"를 뜻하는 "스토르게"라는 단어의 어원도 "강한 혈육의
정"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한국은 점점 부엉이들의 서식처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지면을 장식하는 불효나 패륜의 사례도 그렇지만 뇌물을 받아
"부엉이 살림"을 이룬 고위 공직자들의 비도덕성을 봐도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로마의 "황새법"과 같은 "효도법"이 다시 거론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