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명나라 태조가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쉽사리 인정해 주지 않아 고심해야 했다.

"조선"과 "화영" 가운데 "조선"으로 국호를 삼으라는 명태조의 승인이
난 것은 즉위한 뒤 반년이 지나서였다.

어디 그뿐인가.

국호를 받으러 간 조선 사신 이념을 바르게 꿇어앉지 않았다고
몽둥이질을 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했다.

게다가 "조선의 사신은 이후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폭언까지
퍼부었다.

어쨌든 명태조는 조선국왕 이성계가 고려국새를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주도록 여러차례 간청했으나 끝내 보내지 않았다.

명나라의 성조가 조선의 3대왕인 태종에게 "조선국왕지인"이라는
김인을 보낸 것은 개국 11년뒤인 1403년이었다.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을 폈던 고려나 조선에서 "어보"나 "대보"로
불렸던 국새 또는 옥새란 이처럼 중국의 황제가 하사했던 신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국새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의 즉위
의식에서는 전국의 증표로 전수됐다.

또 왕의 각종 행차때는 그 위의를 과시하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국새는 오로지 대중국 외교문서나 국왕즉위식에만 쓰였다.

이밖에도 국내에서는 여러가지 어보들이 만들어져 사용됐다.

교서.교지 등에 사용되는 "시명지보", 백성들에게 내리는 교유문에
사용되는 "유서지보", 과거관계 문서에 찍는 "과거지보" 등 사용목적에
따라 국내용 어보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끝낸 1894년 갑오경장이후에는 대보가 없어지고
"대조선국보" "대조선대군주지보"라는 국새를 제작해 썼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부터는 "대한국새" "황제지보"
"원수지보" 등 여러가지 국새를 사용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년 "대한민국지새"라는 새로운 국새를
만들었고, 1970년 3월 국새규정을 고쳐 사방 7cm의 정방형 인형에
한글전서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새긴 국새를 만들어 총무처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거북으로 장식된 이 순은제 국새가 닳아 26년만에 새것을 제작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훈.포장, 5급이상 공무원의 임명장, 외교문서 등에 연 5만여회 가까이
찍다보니 마모가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새는 나라의 상징이다.

그러나 공무원 임명장에까지 꼭 국새를 찍어야 한다는 국가 권위주의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