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대부분 환경조형물, 특히 1% 법안의
시행을 둘러싼 것이지만 그 기저에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문화의 공공적
공유라는 의식을 깔고 있다.

그러나 예술 혹은 문화의 공공성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에 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현상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머문다.

미술계에서 그동안 해온 접근 또한 다르지 않다.

공공미술은 이제까지의 미술이 지니고 있는 예술적 개념만으로 해석될수
없으며 그렇다고 단순히 사업적 프레세스만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은 미술 자체의 새로운 지점과 개념적축의 변환과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보다 충분하고 깊이있는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공공미술이란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경제적인 모든 요소들이 예술품의 창작과정과
결과속에서 하나의 목적의식을 이루며 전개된다.

지역의 정책결정자와 프로젝트의 후원자들의 면밀한 지원 속에서
기획자가 작가 및 건축가와 함께 공간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을
거치고 때로는 시민들의 의식을 조사하고 참여를 유도케 함으로써
공공미술의 프로젝트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우 "환경조형물"이라는 말보다 "공공미술"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돈 (공공자금), 장소 (공공장소), 관객 (대중),
내용 (공공적 맥락), 목표 (시민참여 지향) 등 공공적 성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금세기 중반 서구에서는 공공미술이 건축가와 조각가의 반복적인
협업으로 이뤄졌고 또 그 와중에 당시 미니멀한 작품들을 환경에
적응시키는 일련의 노력을 통해 현재 추상조각의 언어가 대중에게 점차
이해되고 환영받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실제적 양상이 명분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로 올수록 공공의 영역이 보다 복합적이 되어가는 가운데 거리의
미술, 게릴라 연극, 비디오 아트 등이 공공미술의 대안적 성격을 띠고
모색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념조각과 환경조각은 잘 구분돼온 듯 한데
"환경미술"내지 "환경조형물"과 "공공미술"은 특별한 구별없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아직은 공공미술의 핵심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막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84년 서울에서 시작해 점차 지방도시로 확산되면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신축할 때 건축비의 일부를 룬화예술품의 설치에
쓰도록 법으로 규정하여 왔는데 이같은 법의 제정 취지에 비추어 보면
일단 공공적 개념이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이 제도의 운용내용과 그 산물들인 작품들이 얼마나
공공미술의 내용적 차원을 실현해 내고 있는가의 문제는 별개인 것 같다.

주위의 공공적 환경은 고려되지 않는 "플로트 아트 (Plop Art)",
즉 물속에 물건을 텀벙 떨어뜨리는듯 미리 다 짜여진 공간속에 작품을
"쿵"하고 떨어뜨려 넣는 작품들이 그것인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미술과
건축을 통해 상징화하고 싶어하는 가치들의 방향이 모호한데서 기인한
것이리도 하다.

지금까지 공공미술이 아닌 "미술장식품"이 많은 수를 차지했으나
최근들어 아트컨설팅 등에서 미술과 공공환경과의 조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공공미술의 인식 제고와 전근대적인 유통구조의 탈피에
어느정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와 문화를 현대적 경영의 관점에서 접합시키려는 기업문화 차원의
전략에서 나온 이런 대응책들은 차츰 공공미술의 전근대적인 중개구조를
보다 현대적이고 경쟁력있게 바꿔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 가나미술문화연구소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