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8일 32차 세계보험총회(IIS)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암스텔담
클라스타 폴스키호텔 대회의장.

"은행을 통한 보험판매 등 타금융기관과의 연계를 통한 새 판매채널을
구축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이 한국보험업계를 대표, 자신에 찬 목소리로 기조연설
을 하고 있었다.

주제는 "세계 보험시장의 단일화시대 개막".

이 자리에 참석했던 30여명의 국내 보험경영인들은 "말이야 맞는 말이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을 메우고 있던 73개국에서 온 600여명도 곧 완전개방될 한국보험시장
에 관한 얘기라 귀를 바짝 세웠다.

이수빈 회장은 삼성생명 회장이면서 삼성화재 삼성증권 삼성카드 등을
총괄하는 삼성금융 소그룹 회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그래서 방카슈랑스 등 보험 판매채널의 다양화를 강조한 이회장의 공식발언
에는 무게가 실려 있다.

삼성생명측은 이에 대해 "장기적인 구상을 밝힌 것이지 방카슈랑스 조기
실시를 주장한 발언은 아니다"라고 의미를 애써 축소했다.

이같은 부인에도 불구, 삼성금융 소그룹의 방카슈랑스 대비작업은 착착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의 새 가족에 입양된 한미은행과의 업무상 공조체제구축이 가시화
되면서 방카슈랑스는 이미 잉태된 셈이다.

삼성그룹은 한미은행 주식의 19%를 가져 BOA(Bank Of America)에 이어
제2대 주주다.

지난 10월28일 서울 조선호텔 20층 중식당 호경전.

생명보험협회 33개사 사장단 총회가 열렸다.

"유럽에서 퍼진 은행의 보험 판매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질
것 같다"

생보협회 신이영 이사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 따른 생명보험
산업의 영향과 대응방향"을 설명하면서 방카슈랑스 문제를 건드렸다.

반주로 포도주를 곁들었던 생보사 사장들이 갑자기 취기가 깨는듯 눈을
크게 떴다.

사장들은 "은행에 먹힐 짓을 우리가 왜 해"라는 눈빛으로 발표자를
쳐다봤다.

"방카슈랑스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며 사장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만히 있다간 난리가 난다.

무언가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메아리가 귓전을 때렸다.

유비불패.

보험사마다 극비리에 "방카슈랑스 방어진"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유사시에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은행들도 물색하고 있다.

그래서 교보생명은 이미 장기신용은행 하나은행의 지분을 10%씩 사들였다.

난세는 헤게모니 탈취에 절호의 찬스.

신설 생보사및 중하위 손보사들은 대형사를 적진에 배치한 작전지도를
그려 놓고 칼을 간다.

보험업계가 은행권에 맞서 자위권을 발동할지 금융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정구학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