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초대석] 이겸노 옹 <통문관 대표> .. 미수 맞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고서점 통문관 (서울 인사동)을 운영하며 70여년을 책과 함께 살아온
산기 이겸노옹이 미수를 맞았다.
지금도 고서수집과 정리작업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는 산기선생은
"월인석보 "초간본 "삼국유사" 최고본 "세한도" 원본 등을 발굴,
영인본으로 보급하며 국학연구의 기틀을 다져온 출판계 원로다.
"쉽고 편한 것만 찾는 세태때문인지 머리를 써야하는 일은 잘 하지
않으려는 것같아요.
학구열이 대단했던 해방직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돼요.
그때는 학생이나 교수를 막론하고 공부하려는 사람들로 서점이 발디딜
틈없이 붐볐지요"
이어 산기선생은 어른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서점 전체가 수천권의 책으로 뒤덮인 통문관이 찾는 사람없이
썰렁한 모습을 볼 때면 까닭모를 허무함을 느끼게된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이 통문관을 맡고있기 때문에 요즘은 하루 한번 운동삼아
들릅니다.
주변의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구요.
그밖의 시간에는 그동안 어렵게 수집한 간찬등의 고문서를 정리하지요"
16세때인 1925년 서점점원으로 책과 인연을 맺은 산기선생은 34년
서울 관훈동 (지금의 수도약국 자리)에 고서점 "금항당"을 차린 뒤
해방직후 서점이름을 "통문관"으로 바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67년 건물을 새로 지었을 때는 헬무트 프렛서 당시 독구텐베르크
박물관장이 찾기도 했다고.
"한자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고문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산기선생은 출판계에서 미수기념잔치를 마련하는 데
대해 고마운 한편으로 송구한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금고 등 출판계는 뜻을 모아 산기선생의
미수를 기념하는 조촐한 잔치를 15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부암동
하림각에서 갖는다.
< 김수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
산기 이겸노옹이 미수를 맞았다.
지금도 고서수집과 정리작업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는 산기선생은
"월인석보 "초간본 "삼국유사" 최고본 "세한도" 원본 등을 발굴,
영인본으로 보급하며 국학연구의 기틀을 다져온 출판계 원로다.
"쉽고 편한 것만 찾는 세태때문인지 머리를 써야하는 일은 잘 하지
않으려는 것같아요.
학구열이 대단했던 해방직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돼요.
그때는 학생이나 교수를 막론하고 공부하려는 사람들로 서점이 발디딜
틈없이 붐볐지요"
이어 산기선생은 어른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서점 전체가 수천권의 책으로 뒤덮인 통문관이 찾는 사람없이
썰렁한 모습을 볼 때면 까닭모를 허무함을 느끼게된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이 통문관을 맡고있기 때문에 요즘은 하루 한번 운동삼아
들릅니다.
주변의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구요.
그밖의 시간에는 그동안 어렵게 수집한 간찬등의 고문서를 정리하지요"
16세때인 1925년 서점점원으로 책과 인연을 맺은 산기선생은 34년
서울 관훈동 (지금의 수도약국 자리)에 고서점 "금항당"을 차린 뒤
해방직후 서점이름을 "통문관"으로 바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67년 건물을 새로 지었을 때는 헬무트 프렛서 당시 독구텐베르크
박물관장이 찾기도 했다고.
"한자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고문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산기선생은 출판계에서 미수기념잔치를 마련하는 데
대해 고마운 한편으로 송구한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금고 등 출판계는 뜻을 모아 산기선생의
미수를 기념하는 조촐한 잔치를 15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부암동
하림각에서 갖는다.
< 김수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