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철저한 품질관리/신용이 성공열쇠" .. 박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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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 삼구그룹회장(64)은 요즘은 "상전벽해"란 말을 처럼 경우가
딱 들어맞는 말은 없을것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듯이 세상만사는 변화가 무쌍하다.
기업은 더더욱 그렇다.
그는 지난 71년 실크원단및 의류전문업체인 삼구통상을 설립, 20년이상
뽕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케이블TV를 통한 홈쇼핑사업으로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는 미래의 유망사업으로 떠오르고있는 홈쇼핑사업이
"푸른 바다"로 느껴지고있는 것이다.
이 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오면 창고형매장과 같은 점포판매사업에도
발을 내디딜 생각이다.
그는 우연히 실크와 인연을 맺어 실크산업의 선구자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견직물수출은 일본을 대상으로한 "홀치기"가 고작이었다.
1평 남짓한 사무실에 10명의 직원이 전부였지만 열정하나로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갔다.
79년 제2차 석유위기가 시작돼 미국시장의 실크수요가 떨어지면서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랑스 이탈리아등 실크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되면서 삼구는
지금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전쟁과 피난의 아수라장이었던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55년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후 잠시 외국무역회사에 일했다.
월급쟁이 생활은 이것이 전부였다.
친구와 오퍼상을 시작한게 긴긴 기업인생활의 첫 걸음이었다.
요즘도 1주일에 한번 그룹간부회의를 주재하며 사업에대한 열정이
식을줄 모르는 박회장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봤다.
=======================================================================
-한때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했던 섬유산업이 사양화되고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요즘 선진국들은 방한 방풍 방수되는 고어텍스등 첨단 신소재들을
개발해내고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섬유기업들이 기술개발을 등한시했다는게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요.
소재만 만드는 업체든, 직물이나 완제품을 만드는 업체든 숙련된 인력이
다른 업종으로 다 빠져나간것도 섬유산업 정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할수
있습니다.
이 업종에선 이젠 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섬유업계는 정부의 지원이 미흡하다는 얘기도 합니다만.
"한때 섬유수출은 너무 잘돼 걱정일 지경이었습니다.
수출이 잘돼 달러가 마구 들어오니까 정부는 인플레와 통화관리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섬유산업과 기업인들을 북돋워주기보다 브레이크를 건적이 더 많았지요.
그래서 섬유인들은 정부나 은행으로부터 푸대접을 많이 받았고 점점
사기가 꺾여갔던 것이죠"
-섬유업이 회생하기위해선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80년대 중반 섬유수출액은 100억달러를 넘어서 총수출액에서 30%의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단일품목으로 따져도 1등이었죠.지금은 반도체 자동차등에 밀려 15%
선으로 수출비중이 떨어졌지요.
사실 삼성 선경 대우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그룹등도 섬유로 사업을
시작한게 아닙니까.
대기업들이 신소재개발을 위한 R&D(연구개발)투자등에 돈과 노력을
아끼지않는다면 충분히 소생할수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실크사업과 인연을 맺게됐습니다.
"71년 당시 전무로 있던 달성주식회사를 순전히 타의에 따라 인수, 서울
북창동에 삼구통상이란 간판을 내건게 실크사업과의 오랜 인연을 맺게된
출발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의 기모노 옷감용으로 쓰이는 홀치기용 18인치 소폭 견직물
수출이 고작이었죠.
일본인들에게 기술은 물론 금융지원도 받았었지요.
단순 하청업체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수있죠"
-사업초기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다.
"일본업체의 하청업으로는 한계가 있어 미국과 같은 큰 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기술자도, 시장개척의 노하우도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이 두가지가 자금부족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국시장은 어떻게 뚫을수있었나요.
"주위에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45인치짜리 양장용 광폭 견직물을 생산, 이걸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당시 미국시장은 거의 화학섬유만 쓰고있었어요.
실크수요가 아주 미미했죠.수요가 적은데다 한국제품이라고 하니
바이어들이 머리를 흔들더라고요.
그때 행운을 만났지요.
ISA(국제견업협회) 부회장으로 있던 피셔씨가 미국실크시장에 대한
자세한 데이터를 주면서 용기를 줬어요.
4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도 맺어줬습니다.
그게 삼구의 실크가 미국시장에 상륙한 첫 단추였습니다"
-특별한 마케팅전략이 있었나요.
"일종의 미인계전략을 썼죠.실크제품이 상류층상대의 하이패션임을
감안, 몸매가 뛰어나고 품위있는 여성모델을 판촉에 활용키로 마음먹고
대상자를 물색했습니다.
마침 여배우출신으로 미국에서 패션을 전공하고있던 전향이씨를
스카우트, 뉴욕의 고급양장점들을 함께 돌아다녔어요.
처음에 별 관심을 보이지않던 양장점주인들과 의류상들이 모델이
걸친 실크원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패션잡지인 "보그"에도 기사가 나가면서 여기저기서 주문이
쏟아져들어왔습니다.
75년에는 경기도 시흥의 새마을공장을 인수, 이때부터 미국수출에
전념했습니다"
-단기간에 미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둘수있었던 요인이 있었을 텐데요.
"엄격한 품질관리와 신용이 가장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불량품이 나오면 수량이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일절 선적하지않았고
밤을 새워서라도 납기일을 반드시 지키켜 바이어들한테 높은 평가를
받게된 것이지요.
패션잡지와 미인계를 이용한 적극적인 마케팅도 한 몫을 했습니다"
-사업에도 고비가 있는것 같습니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78년부터 10여개 업체가 실크수출에 뛰어들어 덤핑판매현상이 나타났고
업체간 기술자 스카우트전도 치열해졌습니다.
수출량이 줄어드는 판국에 기술자들마저 빠져나가는 2중고를 겪어야했지요.
생산과 수출에 차질이 생겨 여기저기서 클레임이 걸려왔습니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던 나로서는 견딜수없는 일이었어요.
결국 인건비부담을 무릅쓰고 예비인력을 두기로 작정했지요.
일부 생산직 근로자가 빠져나가더라도 예비인력을 활용, 납기를 철저히
지키기위해서였어요.
이후 공장은 차질없이 가동됐지만 79년 제2차 석유위기가 닥치면서
또 한번 몸살을 앓아야했습니다.
이때 택한 전략은 미국시장일변도에서 벗어나 유럽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장다변화전략인 셈이지요.
실크선진국인 이탈리아 프랑스보다 제품수준이 뒤떨어져 연구개발비를
대폭 늘리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 다음 판촉활동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해 81년부터 유럽시장에서도 삼구는 완전히 정착하게
됐습니다.
83년에 1,500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려 대통령표창을 받기에 이르렀지요"
-전통사업이라 할수있는 섬유업에서 유통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히셨는데.
"섬유도 소재나 디자인등에서 기술개발에 주력한다면 성장가능성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노동집약산업이라 숙련인력을 구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래서 고민중에 홈쇼핑사업으로 발을 넓히기로 결심했죠.
케이블TV를 통한 홈쇼핑사업은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첨단 유통업이라
생각했던거지요.
실크사업을 하면서 미국의 홈쇼핑산업을 눈여겨봤는데 상품의 유통절차가
거의 없어져 물건값이 싸고 구매가 간편해 소비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좋더라구요.
소비자의 편리성에 주목해 미래의 유망사업이란 확신을 가졌습니다"
-홈쇼핑텔레비전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흑자가 예상되는데 다른
케이블TV업체들이 적자투성이인데 비해 실적이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홈쇼핑사업을 시작하기전 스터디를 철저히 했습니다.
미국 제일의 홈쇼핑TV인 QBC를 벤치마킹대상으로 삼아 운영노하우와
기술등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사업은 방송이란 측면보다 장사란 개념으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조직이나 인력을 부풀려선 안됩니다.
즉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가지않으면 안된다는 얘기죠.
향후 2~3년내에 홈쇼핑사업은 그룹 전체매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할걸로 예상됩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오시면서 몸소 얻은 경영의 요체가 있다면.
"기업경영은 신의 성실이 밑바탕이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환경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만큼 그때 그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죠.
20~30년전 100대기업에 속했다가 지금 사라진 기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에는 자금이 가장 필요한 요소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관건인것
같습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할수있는 시대가 왔다고 봅니다"
-2세경영체제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룹일에 어느정도 관여하시는지요.
"1주일에 한번 그룹 전체 간부회의를 주재합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간 많은 토론이 이뤄지는데 젊은 간부들한테
산지식을 얻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자금관계나 중요정책결정외에 일상적인 경영활동에는 간여하지않고
있습니다"
< 대담 = 김시행 유통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6일자).
딱 들어맞는 말은 없을것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듯이 세상만사는 변화가 무쌍하다.
기업은 더더욱 그렇다.
그는 지난 71년 실크원단및 의류전문업체인 삼구통상을 설립, 20년이상
뽕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케이블TV를 통한 홈쇼핑사업으로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는 미래의 유망사업으로 떠오르고있는 홈쇼핑사업이
"푸른 바다"로 느껴지고있는 것이다.
이 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오면 창고형매장과 같은 점포판매사업에도
발을 내디딜 생각이다.
그는 우연히 실크와 인연을 맺어 실크산업의 선구자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견직물수출은 일본을 대상으로한 "홀치기"가 고작이었다.
1평 남짓한 사무실에 10명의 직원이 전부였지만 열정하나로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갔다.
79년 제2차 석유위기가 시작돼 미국시장의 실크수요가 떨어지면서
유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랑스 이탈리아등 실크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되면서 삼구는
지금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전쟁과 피난의 아수라장이었던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55년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후 잠시 외국무역회사에 일했다.
월급쟁이 생활은 이것이 전부였다.
친구와 오퍼상을 시작한게 긴긴 기업인생활의 첫 걸음이었다.
요즘도 1주일에 한번 그룹간부회의를 주재하며 사업에대한 열정이
식을줄 모르는 박회장을 그의 집무실에서 만나봤다.
=======================================================================
-한때 경제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했던 섬유산업이 사양화되고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요즘 선진국들은 방한 방풍 방수되는 고어텍스등 첨단 신소재들을
개발해내고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섬유기업들이 기술개발을 등한시했다는게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요.
소재만 만드는 업체든, 직물이나 완제품을 만드는 업체든 숙련된 인력이
다른 업종으로 다 빠져나간것도 섬유산업 정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할수
있습니다.
이 업종에선 이젠 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섬유업계는 정부의 지원이 미흡하다는 얘기도 합니다만.
"한때 섬유수출은 너무 잘돼 걱정일 지경이었습니다.
수출이 잘돼 달러가 마구 들어오니까 정부는 인플레와 통화관리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섬유산업과 기업인들을 북돋워주기보다 브레이크를 건적이 더 많았지요.
그래서 섬유인들은 정부나 은행으로부터 푸대접을 많이 받았고 점점
사기가 꺾여갔던 것이죠"
-섬유업이 회생하기위해선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80년대 중반 섬유수출액은 100억달러를 넘어서 총수출액에서 30%의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단일품목으로 따져도 1등이었죠.지금은 반도체 자동차등에 밀려 15%
선으로 수출비중이 떨어졌지요.
사실 삼성 선경 대우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그룹등도 섬유로 사업을
시작한게 아닙니까.
대기업들이 신소재개발을 위한 R&D(연구개발)투자등에 돈과 노력을
아끼지않는다면 충분히 소생할수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실크사업과 인연을 맺게됐습니다.
"71년 당시 전무로 있던 달성주식회사를 순전히 타의에 따라 인수, 서울
북창동에 삼구통상이란 간판을 내건게 실크사업과의 오랜 인연을 맺게된
출발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의 기모노 옷감용으로 쓰이는 홀치기용 18인치 소폭 견직물
수출이 고작이었죠.
일본인들에게 기술은 물론 금융지원도 받았었지요.
단순 하청업체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수있죠"
-사업초기 어려웠던 점은 없었습니다.
"일본업체의 하청업으로는 한계가 있어 미국과 같은 큰 시장을 개척할
필요성이 절실했지만 기술자도, 시장개척의 노하우도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이 두가지가 자금부족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국시장은 어떻게 뚫을수있었나요.
"주위에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45인치짜리 양장용 광폭 견직물을 생산, 이걸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당시 미국시장은 거의 화학섬유만 쓰고있었어요.
실크수요가 아주 미미했죠.수요가 적은데다 한국제품이라고 하니
바이어들이 머리를 흔들더라고요.
그때 행운을 만났지요.
ISA(국제견업협회) 부회장으로 있던 피셔씨가 미국실크시장에 대한
자세한 데이터를 주면서 용기를 줬어요.
4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도 맺어줬습니다.
그게 삼구의 실크가 미국시장에 상륙한 첫 단추였습니다"
-특별한 마케팅전략이 있었나요.
"일종의 미인계전략을 썼죠.실크제품이 상류층상대의 하이패션임을
감안, 몸매가 뛰어나고 품위있는 여성모델을 판촉에 활용키로 마음먹고
대상자를 물색했습니다.
마침 여배우출신으로 미국에서 패션을 전공하고있던 전향이씨를
스카우트, 뉴욕의 고급양장점들을 함께 돌아다녔어요.
처음에 별 관심을 보이지않던 양장점주인들과 의류상들이 모델이
걸친 실크원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패션잡지인 "보그"에도 기사가 나가면서 여기저기서 주문이
쏟아져들어왔습니다.
75년에는 경기도 시흥의 새마을공장을 인수, 이때부터 미국수출에
전념했습니다"
-단기간에 미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둘수있었던 요인이 있었을 텐데요.
"엄격한 품질관리와 신용이 가장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불량품이 나오면 수량이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일절 선적하지않았고
밤을 새워서라도 납기일을 반드시 지키켜 바이어들한테 높은 평가를
받게된 것이지요.
패션잡지와 미인계를 이용한 적극적인 마케팅도 한 몫을 했습니다"
-사업에도 고비가 있는것 같습니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78년부터 10여개 업체가 실크수출에 뛰어들어 덤핑판매현상이 나타났고
업체간 기술자 스카우트전도 치열해졌습니다.
수출량이 줄어드는 판국에 기술자들마저 빠져나가는 2중고를 겪어야했지요.
생산과 수출에 차질이 생겨 여기저기서 클레임이 걸려왔습니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던 나로서는 견딜수없는 일이었어요.
결국 인건비부담을 무릅쓰고 예비인력을 두기로 작정했지요.
일부 생산직 근로자가 빠져나가더라도 예비인력을 활용, 납기를 철저히
지키기위해서였어요.
이후 공장은 차질없이 가동됐지만 79년 제2차 석유위기가 닥치면서
또 한번 몸살을 앓아야했습니다.
이때 택한 전략은 미국시장일변도에서 벗어나 유럽시장을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장다변화전략인 셈이지요.
실크선진국인 이탈리아 프랑스보다 제품수준이 뒤떨어져 연구개발비를
대폭 늘리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 다음 판촉활동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해 81년부터 유럽시장에서도 삼구는 완전히 정착하게
됐습니다.
83년에 1,500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려 대통령표창을 받기에 이르렀지요"
-전통사업이라 할수있는 섬유업에서 유통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히셨는데.
"섬유도 소재나 디자인등에서 기술개발에 주력한다면 성장가능성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노동집약산업이라 숙련인력을 구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래서 고민중에 홈쇼핑사업으로 발을 넓히기로 결심했죠.
케이블TV를 통한 홈쇼핑사업은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첨단 유통업이라
생각했던거지요.
실크사업을 하면서 미국의 홈쇼핑산업을 눈여겨봤는데 상품의 유통절차가
거의 없어져 물건값이 싸고 구매가 간편해 소비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좋더라구요.
소비자의 편리성에 주목해 미래의 유망사업이란 확신을 가졌습니다"
-홈쇼핑텔레비전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흑자가 예상되는데 다른
케이블TV업체들이 적자투성이인데 비해 실적이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홈쇼핑사업을 시작하기전 스터디를 철저히 했습니다.
미국 제일의 홈쇼핑TV인 QBC를 벤치마킹대상으로 삼아 운영노하우와
기술등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사업은 방송이란 측면보다 장사란 개념으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조직이나 인력을 부풀려선 안됩니다.
즉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가지않으면 안된다는 얘기죠.
향후 2~3년내에 홈쇼핑사업은 그룹 전체매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할걸로 예상됩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해오시면서 몸소 얻은 경영의 요체가 있다면.
"기업경영은 신의 성실이 밑바탕이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환경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만큼 그때 그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죠.
20~30년전 100대기업에 속했다가 지금 사라진 기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에는 자금이 가장 필요한 요소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관건인것
같습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할수있는 시대가 왔다고 봅니다"
-2세경영체제가 자리를 잡았는데 그룹일에 어느정도 관여하시는지요.
"1주일에 한번 그룹 전체 간부회의를 주재합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간 많은 토론이 이뤄지는데 젊은 간부들한테
산지식을 얻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자금관계나 중요정책결정외에 일상적인 경영활동에는 간여하지않고
있습니다"
< 대담 = 김시행 유통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