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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칼럼] 가을에 생각나는 것들 .. 정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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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순 <대한생명보험 이사 / 강남총국장>

    한 여름 무성했던 산하가 빛깔을 바꾸고 이내 조락하는 아픔을 보면서
    무상한 소멸과 퇴장대신 더욱 찬란한 생명과 화려한 데뷔를 생각한다.

    무대장식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의 힘찬 리허설로 작은
    가슴이 이리도 뛰기때문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테헤란로의 가로수를 누가 죽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는 계절이 만들어 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말았지만 마른대지에 깊히
    박힌 뿌리로 부단한 펌프질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몇개 남지 않은 잎새가 뚝 떨어져 날릴때 행인들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그것은 안타까운 소멸이 아니라 화려한 입장이다.

    그 자연스러운 추락은 성숙함의 극치다"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가지고 괜한 시위를 한 것같아 쑥스럽다.

    틀림없이 나이탓일게다.

    늙고 죽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심리라고 할까?병적일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이맘때가 되면 녹색야채를 집중적으로 먹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녹색은 생명"이라는 굳은 믿음에서 오는 나만의 돌출행동일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온갖 채소가 가득한 야채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한동안 멈춰서서 그곳에서 푸른 생명을 얻는다.

    그런 증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먹고 보는 것을 떠나 유난히 동절기에 더욱 돋보이는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더 없는 활력을 찾는다.

    사군자 중 묵객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대나무의 청함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를 마주하면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구쳐 난다.

    차가운 밤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는 임의 음성처럼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또한 눈속에 핀 매화는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가?강희안은 "양화소록"
    에서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을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희소함이
    그 첫째고, 나무의 늙은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우며, 살찌지 않고 마른
    모습이 한 없이 단아하고, 꽃 봉오리가 벌어지지 않고 오므라져 있는
    정숙한 자태가 마지막 이유"라고 했지만 무엇보다 매서운 추의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너무 맘에 든다.

    아울러 한국의 모든 여성들 또한 매화 닮기를 소망한다.

    여성도 주례를 설 수 있는 세상이 되어 과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신랑은 대나무 같은 지조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신부는 매화같은
    청초하고 귀한 여인이 되시오"하고 당부하고 싶다.

    생명있는 것을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토속에 자라나는
    보리싹이다.

    눈 덮힌 고랑사이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보리밭! 그것은 내겐 늘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삶의 고단한 순간 순간,무거운 짐으로 주저앉고 싶을때 항상 그런것들을
    생각하면 용기가 생겨난다.

    "겨울이 되어야 솔이 푸른줄 안다"는 말이 있듯 모든것이 퇴색하고
    사라지는 계절에도 진정 생명있는 것들은 더욱 돋보이게 마련이고 우리에게
    큰 위안과 새로운 힘을 준다.

    세상의 많은 어휘중에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 하나만 고르라면 주저없이
    "생명!"이라고 하겠다.

    하찮은 들풀을 보자.

    조그만 풀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돋고 자라서 들꽃을 피워낸 뒤 늦가을
    바람에 씨를 날려 여러 생명의 기적을 남긴채 소멸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씨를 통해서 완벽하게 되살아 난다.

    봄날 들풀은 아우성치며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리지 않는가?

    이 가을에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명을 키워내는데만 고스란히
    바쳐져야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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