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 정치/경제/국제총괄부장 >

시계가 거꾸로 간다.

최근 김영삼정부의 경제정책발표를 보면 60년대 박정희대통령의 "계획경제
시대"로 되돌려지고 있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프랑스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가 환생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고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경쟁력을 10%높여라"

"경상적자를 반으로 줄여라"

"금리를 1%내려라"

개발연대에서나 먹힐듯한 이같은 구호들이 난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주의식 경제구호라고까지 느껴지는 정책을 내놓는 인식체계와 자유
다원주의와 개방주의를 표방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입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좋은 구호니까 해될 것이 없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체화된 수치목표"라도 있으니 이의 실천을 위한 국민적 노력이
동반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목표달성을 위해 무리한 수단이 동원되다
보면 거기서 얻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결론은 이미 경제학의 고전이
돼있다.

프랑스혁명기의 로베스피에르는 막강한 독재자였다.

그는 국민의 인기를 끌기위해 "우유값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정부가 책정한 가격이상으로 판매하는 사람은 단두대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엄한 경고까지 붙어 있었다.

정부가 이같이 우유값을 동결해 버리자 우유를 생산해오던 농부들이 소
사육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우유공급이 줄어든 것은 불문가지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우유공급이 줄어든 이유를 묻자, 농부들은 "건초값이 비싸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건초값을 내리라"고 엄명했다.

이번에는 수지를 맞추기 어려워진 건초상들이 건초밭을 불살라 버리기
시작했다.

건초가 없는 상황에서 소 사육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프랑스 전역에 우유파동이 난 것은 물론 어린 간난아이들에게 물릴
우유마저 부족해졌다.

로베스페에르의 무모한 우유가격정책이 빚은 재앙이었다.

경쟁력이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10%라는 숫자는
어떤 근거에서 만들어진 숫자며 그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백보 양보하여 이 구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성과측정은
언제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아무도 측정할 수 없는 숫자니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일 것"이라는
발상을 했다면 그것처럼 편리한 관료적 상술도 없을 것이다.

경상적자를 반으로 줄이기 위한 구체적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가장 손쉽게는 일부품목에 대해 수입을 제한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유무역주의시대에는 말도 안되는 얘기다.

정부가 쥐고 있는 통화.재정정책수단에도 움직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이고 근검절약하지 않는 한 정부의
행정수단만으로 경상적자를 반으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금리인하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이자를 내리고 나면 은행들은 손가락 빠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계산 빠른 은행들이 이리 저리 머리를 돌리다 보면
대기업들에 밀려 중소기업들만 곤욕을 치를 것이 뻔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중소기업의 아우성소리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부지시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부.민간 할 것 없이 "요술막대기"라도 찾고 싶은 것이 오늘 우리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냉철한 눈으로 살펴볼때 그런 행운의 "요술지팡이"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지시해서 안될 것이 없다"는 욕심자체가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핵심적 요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목표는 실현가능한 구체안들을 모두 점검한후 "조금 더 노력해보자"는
식으로 제시돼야 한다.

실천방안에 대한 신중한 검토없이 선언적이고도 작위적이며 정치적인
목적에서 목표만 불쑥 내놓는 것은 경제에 주름살만을 안길 뿐이다.

이미 21세기를 내다보는 정보화된 개방경제시대에 정부가 진정으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작은 정부"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인내와 성실로
실천에 옮기는 일이고 이와함께 소박하지만 실현가능한 구체대안을 차근차근
그리고 꾸준히 내놓는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