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눈에 익은 청문의 베개와 이불을 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보옥이 잠든 청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가만히 청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청문을 불렀다.

"청문아, 청문아!"

청문이 혼수상태에서 기기묘묘한 꿈속을 헤매고 있다가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번뜩 눈을 떴다.

아, 그런데 바로 눈앞에 그리운 얼굴이 있지 않은가.

"도련님!"

청문을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보옥의 목을 끌어 안으며 흐느꼈다.

"저는 생전에 다시 도련님을 뵙지 못할 줄 알았어요.

제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는 도련님이 더 잘 아실 거예요"

"그럼 알고 말고. 나도 어머님께 청문이만은 나와 아무 일이 없었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어도 믿지를 않으시는 거야.

밝고 명랑한 청문의 성격이 오히려 어머님의 의심을 사도록 했던
모양이야"

보옥이 청문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저는 아무래도 저의 억울함을 옥황상제님께 호소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도련님이 따라주는 차 한잔 마시고 싶어요"

보옥이 화로 위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상 위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려다가 찻잔에 기름기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에 몇 번 헹구고
나서 차를 정성껏 따라주었다.

그런데 워낙 차의 질이 떨어져 벌겋게 흐린 물이 되고 말았다.

보옥이 청문을 부축하여 일으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마시게 하였다.

청문이 목이 탔던지 차를 물 마시듯 꿀꺽꿀꺽 들이켰다.

이흥원에 있을 때는 청문이 입맛이 까다로워 차맛이 어떻니 저떻니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형편없는 찻물도 아무 말없이 마셔대고 있는
것이었다.

청문이 차를 마시려 보옥과 함께 두 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있었는데,
보옥이 청문의 팔을 내려다보니 마른 장작 같은 팔뚝에 은 팔찌를 네개나
끼고 있었다.

보통 때는 몰라도 이렇게 몸이 쇠약해졌을 때는 그 팔째마저 무겁게
여겨질 것이었다.

"이 팔찌들 말이야,지금은 잠시 빼놨다가 몸이 좋아지거든 다시 끼도록
하라구"

그러면서 보옥이 청문의 팔뚝에서 팔찌를 빼내어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말이야, 이 긴 손톱 두 개도 깎으라구. 손톱을 이런 모양으로
가꾸는 것도 다 건강했을 때 부리는 멋이지, 병든 몸에 이런 손톱을 하고
있는 건 저승사자를 빨리 불러들이는 꼴밖에 되지 않지"

보옥이 길게 자란 청문의 왼손 중지와 무명지의 손톱까지 깎아주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