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금고] 나의 사랑 나의 금고 : 이동훈 <합동상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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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한참 잘 돌아가던 80년대 중반쯤이었지요. 갑자기 경기가
어려워지고 자금사정이 나빠지더니 자금줄이 딱 끊기는 거예요. 한창 사업
확장을 하느라 운전자금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눈앞이 깜깜하더군요. 은행을
전전하면서 담보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야박하게 퇴짜만 맞았지요. 은행문턱
이 높다는걸 그때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삼화금고인데 의외로
쉽게 대출해 주더군요. 아마 금고가 없었다면 우리 회사도 오래전에
사라졌을 겁니다"
서울 중구 흥인동 우일타운에서 합동상사를 운영하는 이동훈사장(42).
회사가 어려울때 고락을 같이 해준 삼화금고에 열렬한 예찬을 보내는 그는
"망망한 대해를 표류하다 돛단배를 만난 것 같았다"며 당시를 회고한다.
그가 처음 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79년.
동대문종합시장에서 가족과 함께 화섬직 도매업을 시작했다.
사업규모가 커지고 급전과 어음유통이 많아지자 83년 광희시장으로
옮기면서 금고와 거래를 텄다.
"그때만해도 금고가 안정돼 있지 못했어요. 실제로 첫 거래금고는 사고가
났지요. 삼화금고로 거래처를 옮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정성이 의심스러워 긴가민가 했어요. 하지만 거래를 하면 할수록 끝까지
일처리를 전담해 주는 모습에 믿음이 가더군요. 게다가 편리한 부대서비스와
여러가지 사업정보도 제공해주니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지요"
금고의 도움으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던 그에게도 적잖은 시련이 있었다.
86년에는 거래처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회사를 날려 버릴
뻔하기도 했고 금융실명제 실시로 시중자금이 꽁꽁 얼어붙었던 93년에는
10원 한닢이 아쉬워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또 지난해 노태우.전두환 비자금사건으로 자금시장이 어려워졌을때 생긴
생채기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이사장은 그때마다 금고를 찾아 부도위기를 넘겼다고 말한다.
"자금사정이 악화되면 중소상공인은 죽을 맛입니다. 융통어음을 많이
거래하는 상인들은 진성어음(세금계산서가 첨부된 어음)만 취급하는 은행
에는 얼씬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금고에서는 은행에서 꺼리는 융통어음도
받기 때문에 자금을 쉽게 대출할수 있지요"
이외에도 그가 금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금융업무를 창구가
아닌 사무실에서 처리할수 있고 휴일이나 은행 영업시간후에도 자금을
예치할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금고에 설치된 문화센터 스포츠클럽등 각종 문화복지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수 있는 것도 그를 즐겁게 한다.
"금고는 자영업자나 서민에게 가장 소중한 벗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제한된 업무로는 늘어가는 금융수요자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없지요. 금고가
서민금융기관으로 뿌리내리려면 더욱 편리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3일자).
어려워지고 자금사정이 나빠지더니 자금줄이 딱 끊기는 거예요. 한창 사업
확장을 하느라 운전자금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눈앞이 깜깜하더군요. 은행을
전전하면서 담보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야박하게 퇴짜만 맞았지요. 은행문턱
이 높다는걸 그때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삼화금고인데 의외로
쉽게 대출해 주더군요. 아마 금고가 없었다면 우리 회사도 오래전에
사라졌을 겁니다"
서울 중구 흥인동 우일타운에서 합동상사를 운영하는 이동훈사장(42).
회사가 어려울때 고락을 같이 해준 삼화금고에 열렬한 예찬을 보내는 그는
"망망한 대해를 표류하다 돛단배를 만난 것 같았다"며 당시를 회고한다.
그가 처음 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79년.
동대문종합시장에서 가족과 함께 화섬직 도매업을 시작했다.
사업규모가 커지고 급전과 어음유통이 많아지자 83년 광희시장으로
옮기면서 금고와 거래를 텄다.
"그때만해도 금고가 안정돼 있지 못했어요. 실제로 첫 거래금고는 사고가
났지요. 삼화금고로 거래처를 옮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정성이 의심스러워 긴가민가 했어요. 하지만 거래를 하면 할수록 끝까지
일처리를 전담해 주는 모습에 믿음이 가더군요. 게다가 편리한 부대서비스와
여러가지 사업정보도 제공해주니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지요"
금고의 도움으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하던 그에게도 적잖은 시련이 있었다.
86년에는 거래처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회사를 날려 버릴
뻔하기도 했고 금융실명제 실시로 시중자금이 꽁꽁 얼어붙었던 93년에는
10원 한닢이 아쉬워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또 지난해 노태우.전두환 비자금사건으로 자금시장이 어려워졌을때 생긴
생채기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이사장은 그때마다 금고를 찾아 부도위기를 넘겼다고 말한다.
"자금사정이 악화되면 중소상공인은 죽을 맛입니다. 융통어음을 많이
거래하는 상인들은 진성어음(세금계산서가 첨부된 어음)만 취급하는 은행
에는 얼씬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금고에서는 은행에서 꺼리는 융통어음도
받기 때문에 자금을 쉽게 대출할수 있지요"
이외에도 그가 금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대부분의 금융업무를 창구가
아닌 사무실에서 처리할수 있고 휴일이나 은행 영업시간후에도 자금을
예치할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금고에 설치된 문화센터 스포츠클럽등 각종 문화복지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수 있는 것도 그를 즐겁게 한다.
"금고는 자영업자나 서민에게 가장 소중한 벗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제한된 업무로는 늘어가는 금융수요자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없지요. 금고가
서민금융기관으로 뿌리내리려면 더욱 편리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