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숍 우화에 "늑대와 소년"이라는 얘기가 있다.

한번 신용을 잃으면 쉽사리 회복하기 힘들다는 평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지난 24일 마닐라에서 열린 김영삼대통령과 클린턴미국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뒤 정부고위당국자가 보여준 언행은 이 케케묵은 우화의
교훈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25일 오전 청와대와 외무부 기자단의 숙소가 있는 마닐라 하이야트호텔.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외무부 고위당국자가 아침 일찍 조찬간담회를
자청했다.

전날밤 예고없이 기자단 숙소를 찾아왔다가 "허탕"을 친 뒤였다.

이날 급조된 간담회의 요지는 대북정책에 대한 한미간 이견은 없으며
양국정상은 회담에서 북한측에 잠수함 사건에 대한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을 강력히 촉구키로 합의했다는 것.

다분히 언론보도를 의식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4자회담에 나와서 사과 및 재발방지약속 등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할 경우 양국정상이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정부가 기회있을
때마다 천명해온 "선사과-후대화"방침에서 사실상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당국자는 정부의 기존방침이 변한게 하나도 없다고 강변했다.

이 당국자는 이날 중요한 말을 했다.

그는 "그동안 미국이 북한의 사과표명에 대한 의구심때문에 북측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클린턴
대통령이 잠수함사건에 대한 심각성과 한국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언급했다.

이 당국자의 말대로라면 대북정책을 놓고 한미공조는 "물샐틈이 없다"던
정부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미국이 잠수함 침투사건과 관련, 북측에 강력한 사과 및 재발방지
촉구를 주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국자의 입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정부는 여러차례에 걸쳐 "선사과-후대화"라는 정부방침에 있어 한미간
이견이 없다고 강변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선사과방침과 미국측의 선대화주장이 맞서 있었음이 사실로
확인된 상황에서 굳건한 한미공조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년"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통일 외교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정책의
신뢰성회복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건호 < 정치부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