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국이 통신분야의 쌍무협상 혹은 다자간협상에 임하는 태도를
보면 과거 동서냉전시대 미국이 누렸던 막강한 힘의 논리를 연상케 된다.

적어도 통신분야의 협상만을 두고 말한다면 미국은 무소불위의 특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상대로 미국은 이번 APEC(아-태경제협력체)정상회의에서 정보기술제품의
관세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ITA(정보기술협정)에 대한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비록 2000년까지의 철폐시한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이 협정은
개별국가에 약간의 신축성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오는 12월 싱가포르
WTO(세계무역기구)각료회의에서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연간 세계시장규모가 1조달러에 달하는 정보기술제품이 무관세화되면
메모리반도체 외에 뚜렷한 비교우위를 갖지 못한 한국의 정보통신관련
장비산업은 급격히 국내시장을 상실할 것으로 우려된다.

우리정부는 다음달 초순으로 예정된 제3차 한-미 통신협상을 앞두고
지난 22일 유럽연합(EU)과 통신장비조달협상을 타결했다.

통신서비스업체의 장비조달시장을 둘러싸고 3년이상 끌어온 힘겨루기가
WTO 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된 끝에 "상호개방"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우리측으로선 결과적으로 한국통신의 장비조달개방을
허용하고 만 셈이다.

또 EU 요구대로 민간기업의 장비구매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을 사실상
보장하는 별도의 서한(Side Letter)을 교환한 것도 앞으로 한-미 통신협상의
향방을 유추케 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정부는 한-미 통신협상에서도 민간기업의 통신장비구매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을 명문화하자는 미국의 요구를 별도서한 형식을 빌려 사실상
수용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비록 협정이 아닌 별도서한 형식이긴 하나 민간사업자의 장비구매
불간섭원칙을 문서로 보장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 WTO규정은 "민간기업의 경우 상업적 고려에 따라
독자적으로 장비를 구매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어 쌍무협상에서 새삼스럽게
정부불간섭원칙을 문서로 보장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같은 보장문서는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반성문"성격이
짙어 상대방에게 엉뚱한 빌미만 제공하게 될 소지가 크다.

이미 국내 신규통신서비스업체들이 자유롭게 외국회사들과 속속
제품구입계약을 맺고 있는 마당에 마치 우리정부가 큰 간섭이라도
해온 것처럼 비쳐진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런 일이 아니다.

물론 미국이나 EU라는 거인을 상대로 통신협상을 해야 하는 우리정부의
어려운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랬듯이 "끝까지 버텼으나 힘에 밀렸다"는 식의
체면치레용 통신협상이 돼서는 곤란하다.

특히 우리가 막대한 무역적자를 내고 있는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조금도
꿀릴 이유가 없다.

정부는 미국에 대해 좀더 당당한 자세로 쌍무통신협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WTO체제 안에서 다자간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