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연못의 연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제문을 계속 읽어
나갔다.

습인과 견습시녀들은 제문을 읽어나가는 보옥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시울을 훔쳤다.

"그대와 내가 부채들을 찢던 날을 기억하도다.

그대가 내 부채를 잘못 떨어뜨려 부러뜨린 일로 내가 책망을 하자
그대의 마음이 많이 상하였으나 내가 그대와 부채 찢는 놀이를 하자
그대의 얼굴 환하게 밝아졌도다.

쫘악 쫙 찌익 찍, 부채 찢어지는 소리, 뚜욱 뚝, 부챗살 부러지는 소리,
까르르 까르르, 그대 웃음소리, 그때는 그대와의 이별, 그대의 죽음,
상상도 하지 못하였어라.

그러나 그대는 누명을 쓰고 분통한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갔으니
내 마음 그 부채들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도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그대가 연꽃을 돌보는 신령이 된
사실이니 자비로움을 상징하는 연꽃들을 돌보다 보면 그대의 원통한
마음도 풀려 연꽃처럼 풍성하고 안온해지리라.

이것이 그대가 연꽃의 화신이 된 연유러니, 연꽃을 볼 적마다 내
마음에서 그대 모습 언제까지나 활짝 피어나 향기를 발하리.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대의 몸은 찾을 길 없으니 이 이별의 슬픔 어찌
감당하리요.

서해에 있는 취굴주라는 곳에 반혼수라는 나무가 있어 그 뿌리를 달여
만든 각사향을 먹으면 죽은 자도 혼이 돌아와 살아난다고 하는데, 취굴주
가는 길은 어디메며 각사향은 어디서 구할 건가.

이 쓸쓸한 가을, 그대가 꾸던 꿈조각은 외로운 이불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주인은 간데 없어 그대의 방은 빈방이어라"

보옥이 가만히 한숨을 쉬고 나서 연꽃 가지에 걸어둔 제문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견습시녀로 하여금 제문을 손으로 붙들고 있게 하였다.

제문을 적어둔 흰 비단이 하늘거리는 모양이 마치 청문의 혼이 지상을
떠나기 싫어 머뭇거리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제문을 읊는 보옥의 목소리가 더욱 낭랑해졌다.

"이슬과 이끼에 덮인 가을 뜨락, 드리워진 문발 사이로 다듬이 소리
얼음처럼 차갑게 새어나오고, 비에 젖은 담쟁이 덩굴 너머 피리소리
처량하도다.

아름다운 몸이 스러지기 전에 난간 밖의 해당화가 먼저 시들었도다.

향기로운 이름은 결코 죽지 않는 법, 처마에 깃든 앵무새 아직도 그대
이름 부르며 우짖도다.

그대와 숨바꼭질하던 병풍 뒤에는 이제 그대의 발자국 소리 없고,
그대와 풀싸움 하던 정원에는 그대의 자취 없어 난초만 그윽히 움이 트도다.

금실 은실 아무리 많아도 그 누가 내 채색 저고리 마름질해주랴.

그대 떠나고 없으니 곳곳에 그대 숨결 느껴지도다.

그대의 정성 배지 않은 곳 그 어디 있으랴"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