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초 김우중대우그룹회장 집무실.

김회장은 이제 막 수행비서로 배치받은 정인섭사원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자네 나와 같이 다닐 자신있나" 김회장의 "자신있냐"는 물음의 대상은
다름아닌 체력.

"든든한 체력"은 김회장의 개인비서를 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 그룹총수 수행비서의 하루는 꼭두새벽 회장 자택으로
출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총수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이룩한 부의 성만큼이나 바쁘고 부지런하다.

따라서 비서들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은 빠르면 밤12시, 늦으면
새벽 2시다.

대우그룹이 수행비서를 신입사원에게 맡긴 이유도 가장 "생생"할
때라야만 이같은 중노동(?)을 감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룹 총수의 비서는 회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한다.

누군가를 "모시는" 것은 철저히 자신을 포기할 때라야 가능하다.

더구나 보좌해야 하는 대상이 그룹 총수라면 얘기는 더욱 심각하다.

적어도 비서 역을 맡은 기간동안엔 "자신"을 잊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비서는 힘들고 어려운 보직이다.

비서팀은 통상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조직"으로 평가된다.

회장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업무다.

회장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야 하며 때론 회장의 심기까지도
살펴야 한다.

만나고 싶지 않은 방문객은 적당히 따돌릴 줄도 알아야 하고 회장이 던진
한마디 말의 의중까지 헤아려야 유능한 비서다.

회장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

따라서 회장 수행비서들은 "3불"이 불문율이다.

회장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그것이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룹의 스타일과 총수의 성격에 따라 비서들의 역할과 기능도
천차만별이다.

현대 삼성 LG그룹은 회장실 또는 비서실 내에 별도의 비서팀이 있는
케이스.

세가지 불문율 현대그룹의 비서실은 회장의 일정을 관리하고 수행하는
순수한 비서기능만 한다.

수행비서가 곧 비서실장이다.

정주영명예회장과 정몽구회장의 수행비서는 모두 차장급이다.

정명예회장의 수행비서 역할을 맡고 있는 정희찬차장은 지난 89년부터
이 일을 맡고 있다.

현직 수행비서중 최고참.

정명예회장의 표정만으로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 정도로 베테랑이다.

삼성그룹의 비서실은 타 그룹의 기획조정실에 해당된다.

그룹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곳으로 고 이병철회장때부터 명칭이
"비서실"이었다.

따라서 순수한 비서업무는 비서실내 7개팀 중의 하나인 비서팀이 맡는다.

비서팀은 그룹 비서실의 총무부 역할도 같이 수행한다.

팀장은 이창열상무이며 이건희회장의 수행비서는 역시 차장급이 맡고
있다.

수행비서는 통상 계열사에서 차출돼 2년정도 일을 맡는게 관례.

역할이 끝나면 "고생했다"는 차원에서 격려성 유학을 보내주고 있다.

현재 수행비서인 김준차장은 올초부터 이 일을 맡고 있다.

입.귀.눈 단속 LG그룹 비서팀은 회장실소속으로 전체 인원은 팀장을
포함해 28명이다.

이들중 회장 수행비서는 한명이며 나머지는 허창수 전선회장 등 회장단을
보좌하는 스태프진.

비서팀장은 박규석이사가 맡고 있다.

박이사는 비서팀장을 맡기전까지는 회사생활의 대부분을 해외영업직에서
보낸 해외통.

지난 92년 회장실 경영혁신본부로 자리를 옮겨 93년부터 비서실에서
근무중이다.

구본무회장과 관련된 에피소드 한토막.

구회장은 약속시간을 잘 지키기로 정평이 나있다.

약속장소가 멀 경우 통상 수행비서보다 먼저 약속장소에 나타나 비서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고 한다.

대우그룹 역시 별도의 비서팀이 있으나 조직은 단출하다.

회장 수행비서는 단 한명이다.

"브레인"은 필수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이 수행비서를 맡는 것도 독특하다.

스케줄관리가 가장 중요한 업무.

김회장이 워낙 약속이 많고 부지런해 체력이 좋아야 수행비서를 할 수
있다.

올초 비서팀에서 "건강을 생각해서 운동도 좀 하시죠"라고 건의했다가
"운동은 무슨 운동, 일이 운동이지"라고 야단만 맞았다는 일화도 있다.

비서팀장은 이영현부장이 맡고 있다.

선경그룹 역시 비서실에선 의전역할만 한다.

실장과 수행비서 등 5명이 한팀이며 회장의 스케줄관리가 주요 업무.

수행비서를 하다보면 궂은일도 많이 만난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말 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노태우씨
비자금사건.

수행비서들은 자신이 모시는 회장이 줄줄이 검찰청사로 소환당했을 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입을 모은다.

모든 상황에서 비서들이 동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초 삼성자동차 신호공장이 기획한 "KPQ-1"프로젝트에선 수행비서가
물을 먹은 케이스.

이 프로젝트는 삼성의 제휴선인 닛산자동차에서 시험생산된 승용차를
들여와 이건희회장과 그룹 고위층에게 보인 뒤 다시 일본으로 내보내되
외부엔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위장포에 겹겹이 둘러싸여 신호공장으로 반입된 문제의 차는 이회장과
임경춘 자동차부회장, 비서실 기획팀장 등 단 6명만 볼 수 있었다.

수행비서도 문밖에서 대기할 수 밖에 없었다.

비서팀의 위상은 회장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진다.

회장이 비서팀에 무게를 실어줄 수도 있고 그야말로 일정관리만 담당케
할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비서팀의 위치에 따라 위상이 차이가 난다는 것.

그래서 어떤 그룹에선 비서팀 사무실이 회장실과 얼마나 붙어있는지 또는
같은 층에 있는지 여부에 따라 비서팀의 입지를 추측하기도 한다.

삼성그룹의 경우 비서팀 사무실이 본관 28층에 있다.

이 곳은 이건희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층.

외부인사가 28층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일단 27층에 내려서 한층을
걸어올라가야 한다.

사장단들도 이 층을 방문하는 일이 드물만큼 그룹 내부인들에게도 접근이
통제되는 곳이다.

사무실이 28층에 있다는 사실은 회장의 "그림자"로 불리는 비서팀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