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문을 다 읽고 난 보옥이 연꽃 가지에 걸려 있는 제문을 들어올려
소지 의식처럼 불살랐다.

제문이 적혀 있는 하얀 비단이 불꽃들을 거느리고 바람에 흩날렸다.

보옥은 풍로의 차를 한잔 따라 연못에 부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인과 견습시녀들도 보옥을 따라 일어서려다가 그만, "아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보옥이 웬일인가 하고 급히 돌아보았다.

"저어기, 청문 언니가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봐요"

견습시녀 하나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연못 너머 축산 쪽을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부연 안개속에 축산을 돌아나오는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제를 지내면 죽은자의 혼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고도 하던데, 도련님이
지은 제문이 워낙 명문이라 청문의 넋이 감동을 했나 봐요.

그런 제문 읊는 소리를 들으면 제가 저승에 있다 해도 한걸음에 달려오고
말겠어요.

저기 보세요.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습인의 목소리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보옥 역시 머리끝이 서는 기분을 느끼며 바짝 긴장하였다.

그 여자가 연못 쪽으로 다가오자 마치 연꽃에서 바로 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후후후, 왜 그리 놀라세요?"

청문의 귀신이라고 여겨지는 그 여자가 웃음까지 흘리자 모두들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보옥은 그 여자의 음성이나 어투로 보아 청문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죠? 호호호"

여자가 성큼 보옥 곁으로 다가오며 허리를 구부리면서 웃어댔다.

이제 보니 대옥이었다.

"난 또 누구라구? 모두 놀랐잖아. 연꽃의 신령이 된 청문에게 제를
드린 직후에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났으니 말이야"

"제가 끝났으니 나타났죠. 제를 드리고 있는 중에 어떻게 나타나요?
가만히 제문 읊는 소리나 듣고 있어야죠"

"그럼 제를 드리는 동안 축산 뒤에서 숨어서 엿들었단 말이야?"

"그럼요. 도련님의 제문은 조아비(조아비)에 못지 않아요"

"조아비?"

"후한때 효녀로 이름난 조아 있잖아요.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 시체를 찾지 못해 강가에서 열이레 동안을
울다가 마침내 조아도 물에 빠져 죽었지요.

그런데 닷새만에 아버지 시체를 끌어안고 물 위로 떠올랐지요.

그래 사람들이 조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조아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이 명문 중의 명문이지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