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과 청문이 지나간 일들은 화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또
한차례 지옥의 불길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청문이 바위 뒤로 피하고 보옥은 귀졸의 인도를 받아 다른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청문에게 제를 드리고 났을 때 청문의 귀신인양 안개 속에서 축산을
돌아나와 연꽃 너머로 그 모습을 보이던 대옥이 바로 보옥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옥 누이가 여기 웬일이야"

보옥이 깜짝 놀라 지옥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물었다.

"도련님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에요? 혼인식을 막 마쳤을텐테 처갓집으로
가지는 않고 저승으로 오다니요? 아직 이런 곳에 올 때가 멀었잖아요?"

대옥이 지옥 사람들이 입고 있는 푸른 옷을 입고 청문처럼 파리한 얼굴을
한 채 보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옥 누이야말로 이런 곳에 올 때가 멀었잖아. 언제 여기로 온 거야?"

"여기로 온 지 이틀도 채 안 되었어요.

나는 도련님이 보채 언니랑 혼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통한 마음으로
슬퍼하다가 병이 깊이 들어 죽게 되었어요.

여기 저승으로 오니 원통한 마음을 풀지 않았다 하여 이 지옥으로
보냈어요.

도련님도 나와 같은 지옥 벌을 받기 위해 여기로 왔나요?"

"나는 영영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것 같애.
근데 난 이승에서 대옥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도련님이 충격을 받을까 싶어 모두 쉬쉬하며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리가 없지요.

지금쯤 집안 어른들이 사람을 불러 내 시신을 염하고 있을 거예요.

내 모습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려면 빨리 돌아가셔야 할 걸요"

대옥의 말을 듣자 보옥이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대옥의 죽음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지.

"아이구, 아이구"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울지 말아요.

옥황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얼마 동안 지옥불로 정화된 뒤에는
태허환경으로 들어가 선녀가 될 거라고 하였어요.

나중에 도련님이 태허환경으로 놀러오시면 나를 언제라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청문은 그런 소리를 안 하던데, 이 원통 지옥에서 영벌을 받게 될
것처럼 말하던데.

난 청문이 연꽃 신령이 되어 벌써 태허환경으로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청문은 나보다 좀더 오랫동안 지옥불로 고통을 당하겠지만 결국 나처럼
태허환경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연꽃 신령도 될 수 있겠죠"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