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상 < 한국리서치 사장 >

성공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통이 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에 대하여 찬사와 동시에 어느정도의 질시를
보내지만,그 뒤에 숨어있는 쓰라린 실패의 체험을 이해하면 그 질시는
없어질 것이다.

진로가 60년 전통의 진로소주라는 상표의 약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브랜드의 소주를 내고자 하였던 것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지난 94년 경쟁상표가 "부드러운 소주"라는 광고로 소주 기피층을 파고들자
진로는 소주의 도수를 25도에서 21도로 낮춘 저도수소주인 나이스를 출시
하였다.

"더이상 부드러운 맛은 없다"라는 광고 카피와 만화 캐릭터를 이용한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경쟁상표로 빠져 나간 소비자를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소주 음주자들로부터 나이스 소주 맛은 싱겁고 이상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막강한 유통조직을 통하여 대리점 밀어내기 작전을 폈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에 부닥쳤다.

소비자가 찾지않는데 대리점에서 소매점이나 업소로 마냥 밀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로의 경영진은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였다.

가장 강조한 것은 "주질".

내부에서도 좋은 품질이라고 인정할수 있고 소비자들로부터도 좋다고 인정
받을수 있는 주질의 소주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소주 시장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소비자 조사와 기존 소주 상표에 대한
소비자의 심리적 태도및 주질에 대한 평가 조사를 수차례 실시하여 제품
개발 방향을 설정하였다.

"역시 저도 소주는 시기상조다. 25도의 도수로서 소비자의 입맛에 가장
어울리는 새로운 소주를 만든다"는 방향이 수립되었다.

제품개발 담당과장은 아침에 출근하여 전날 개발실에서 만든 소주부터
시음해 본다.

그것도 여러 잔을 마셔보아야 한다.

곡물 주정 숙성 소주원액을 3% 5% 7% 10% 넣은 것을 한잔씩만 마셔 보아도
네잔이다.

한잔 가지고 맛을 모르겠으면 두잔씩, 그러면 여덟잔이 된다.

아침에 안주도 없이 소주 한병을 마시고 업무를 시작하는 셈이다.

최종적으로 세가지 시제품을 만들어 조사 전문기관에 소비자 관능테스트를
의뢰하였다.

그 중에서 두가지를 고르고, 또 소비자 조사후 한 가지를 고르는 과정을
거쳤다.

동시에 집단심층토의와 개념 테스트를 거쳐 포지셔닝을 압축하여 갔다.

"참나무 향 그윽한 물 맑은 소주"가 최종적으로 압축된 포지셔닝이었다.

그것을 그대로 상표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여 다시 상표명
테스트를 거쳐 "참나무통 맑은소주"라는 브랜드가 탄생되었다.

아침마다 소주 한병을 먹으면서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 라벨과 병 모양을 완성하면 출시 준비는 끝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꿀과 올리고당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도 점검하였다.

꿀은 역시 소주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새로운 경쟁 상표가 튀어나와 진로는 물론 기존 경쟁상표까지 휩쓰는
것이다.

"소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던 "꿀"이 소주 시장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꿀" 소주에 대한 마케팅 추적조사를 즉시 실시, 매주 "꿀" 소주에 대한
소비자의 심리적 반응을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참나무통 맑은소주를 시판하였다.

결과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꿀" 소주를 이길 것인가.

참나무통 맑은소주는 후발 제품이다.

광고비도 "꿀" 소주의 절반정도밖에는 없는 지경에서 참나무통이 꿀을
능가할 수 있을까.

매주 들어오는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꿀 소주의 인지 강도, 이미지, 재음용률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고
아직 꿀 소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참나무통 소주의 마케팅 지표가 증가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판 3개월만의 일이었다.

주질 포지셔닝 가격 용량 라벨 상표명이 조화된 하나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소비자대상을 받은 참나무통 맑은소주는 실패의 체험이 만들어낸
성공의 한가지 예일 뿐이다.

참신기획상을 받은 LG통돌이 세탁기도 그동안 경쟁상표 대비 열세의
이미지를 받는 고통끝에 이루어진 걸작이다.

"새차니까. 헌차니까. 내차니까"로 연결된 유공의 엔크린 역시 소비자
조사를 통하여 그 포지셔닝의 타당성을 확인한 후 자신있게 일관된 광고
개념을 사용한 수작이다.

마케팅에서 실패는 정말 성공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실패한 제품 개발팀에 다시 한번 성공의 기회를 준 경영자의 결단이
히트 상품을 만든 배경이리라.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