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나산' 이사 박문갑씨..매일 이력서 쓰던 별딴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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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전선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취직하기 힘들죠.
원서는 몇장이나 썼습니까.
벌써 10장짼데 아직도 더써야할 것 같다구요.
만만치가 않죠.
혹시 이런 사람 얘기가 힘이 될지 모르겠네요.
150장의 이력서 끝에 입사한 회사에서 8년만에 이사가 된 사람 이야기요"
국내정상의 여성의류업체인 (주)나산의 박문갑이사.
이 회사의 주력 브랜드인 "꼼빠니아"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그의 나이는
올해 서른 여섯.
입사당시 20만원짜리 봉급쟁이에서 지금은 연봉 8,000만원인 나산그룹
유일의 "30대 별".
그런 박이사가 불과 10년전만해도 "매일 이력서 쓰는 남자"였다면
믿어질까.
"나산에 입사할 때쯤 한묶음에 50장짜리 이력서 용지 세묶음이 동이
났습니다.
삼류대 출신(박이사는 끝내 출신학교 밝히기를 마다했다)인 저에게
서류전형을 통과시켜 준 회사는 한군데도 없었고 어쩌다 필기시험-면접으로
만 뽑는 회사에서도 면접위원은 "이 학교가 어디 있죠"라며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죠"
천신만고끝에 한 강사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주)나산의 전신인 나산실업주식회사.
직원 80명에 방배동 이수중앙시장 한 귀퉁이의 2층짜리 건물을 사옥으로
쓰는 전형적인 중소의류업체였다.
"돈오점수(문득 깨닫고 점차 수양한다는 뜻)"라고 할까.
첫 출근날,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덕에 그는 득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은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86년 2월17일 첫 출근날이었죠.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낡디낡은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지금 이모양 이꼴이 된 것은 처음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던 내 인생 탓이다.
고등학교때도 그랬고 재수 삼수할 때도 그랬지 않은가.
이제 더는 물러설데가 없다.
오늘의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자"라구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후 뒤척이는 새벽잠에서 그를 벌떡 깨월줄
수 있었던 것은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계단을 오르던 그 모습"이었다.
영업부원으로 입사한 그가 처음 1년간 허드레 창고일을 본연의 업무처럼
해낼수 있었던 것도 "처음의 마음(초심)"덕이었다.
학벌의 콤플렉스를 깨기 위해 야간과정인 성균관대 무역대학원에
입학해 25명의 입학동기중 유일하게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의지도
"첫 출근날"에서 나왔다.
"열심히 하면 눈에 들고 눈에 들면 기회가 오는 법" 입사 1년6개월
뒤인 87년 여름 초고속 승진의 서막이 올랐다.
남들보다 6개월 앞서 주임이 되더니 이듬해에는 대리, 또 그다음해에는
과장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년뒤에는 부장업무를 맡는 차장에, 또 2년후에는 부장이 됐다.
박이사의 성장사는 곧 회사의 발전사.
나산은 88년 "조이너스"로 여성의류 업계에서 정상에 올랐고 강남구
대치동에 10층짜리 웅장한 사옥을 마련, 초라한 "방배동시절"에서 화려한
"대치동 시절"을 맞고 있었다.
어찌 잘 되는 일만 맡을 수 있겠는가.
94년 박이사는 입사후 제2의 인생이라 할만한 일을 맡게 된다.
상반기 매출이 20억원에도 못미칠 정도로 "죽쑤던" 한 브랜드의 매출을
책임지라는 지시를 받고 1주일간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자고 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에 마음이 동한 그는
불구덩이에 뛰어들었고 결국 회사의 목표치를 넘어 하반기 매출을
120억원으로 끌어 올렸다.
이 업적으로 "나산의 FIRE MAN"이 된 그는 94년 12월 입사 8년10개월만에
별을 땄다.
10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지옥과 천당을 화끈하게 경험한 박이사.
그는 자신처럼 출발선상에서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통, 외로움, 부모님들에 대한 송구스러움,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즐기세요.
그러나 높은 산까지도 다 잡아먹은 늪이 돼서는 안됩니다.
대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미약한 새똥에도 곧바로 반응을 하고 호수처럼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세요.
기회는 언제든지 오는 법입니다"
<윤성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9일자).
"취직하기 힘들죠.
원서는 몇장이나 썼습니까.
벌써 10장짼데 아직도 더써야할 것 같다구요.
만만치가 않죠.
혹시 이런 사람 얘기가 힘이 될지 모르겠네요.
150장의 이력서 끝에 입사한 회사에서 8년만에 이사가 된 사람 이야기요"
국내정상의 여성의류업체인 (주)나산의 박문갑이사.
이 회사의 주력 브랜드인 "꼼빠니아"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그의 나이는
올해 서른 여섯.
입사당시 20만원짜리 봉급쟁이에서 지금은 연봉 8,000만원인 나산그룹
유일의 "30대 별".
그런 박이사가 불과 10년전만해도 "매일 이력서 쓰는 남자"였다면
믿어질까.
"나산에 입사할 때쯤 한묶음에 50장짜리 이력서 용지 세묶음이 동이
났습니다.
삼류대 출신(박이사는 끝내 출신학교 밝히기를 마다했다)인 저에게
서류전형을 통과시켜 준 회사는 한군데도 없었고 어쩌다 필기시험-면접으로
만 뽑는 회사에서도 면접위원은 "이 학교가 어디 있죠"라며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죠"
천신만고끝에 한 강사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주)나산의 전신인 나산실업주식회사.
직원 80명에 방배동 이수중앙시장 한 귀퉁이의 2층짜리 건물을 사옥으로
쓰는 전형적인 중소의류업체였다.
"돈오점수(문득 깨닫고 점차 수양한다는 뜻)"라고 할까.
첫 출근날,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덕에 그는 득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은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86년 2월17일 첫 출근날이었죠.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낡디낡은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지금 이모양 이꼴이 된 것은 처음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던 내 인생 탓이다.
고등학교때도 그랬고 재수 삼수할 때도 그랬지 않은가.
이제 더는 물러설데가 없다.
오늘의 결심을 끝까지 지켜내자"라구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신후 뒤척이는 새벽잠에서 그를 벌떡 깨월줄
수 있었던 것은 "화장실 냄새를 맡으며 계단을 오르던 그 모습"이었다.
영업부원으로 입사한 그가 처음 1년간 허드레 창고일을 본연의 업무처럼
해낼수 있었던 것도 "처음의 마음(초심)"덕이었다.
학벌의 콤플렉스를 깨기 위해 야간과정인 성균관대 무역대학원에
입학해 25명의 입학동기중 유일하게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던 의지도
"첫 출근날"에서 나왔다.
"열심히 하면 눈에 들고 눈에 들면 기회가 오는 법" 입사 1년6개월
뒤인 87년 여름 초고속 승진의 서막이 올랐다.
남들보다 6개월 앞서 주임이 되더니 이듬해에는 대리, 또 그다음해에는
과장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년뒤에는 부장업무를 맡는 차장에, 또 2년후에는 부장이 됐다.
박이사의 성장사는 곧 회사의 발전사.
나산은 88년 "조이너스"로 여성의류 업계에서 정상에 올랐고 강남구
대치동에 10층짜리 웅장한 사옥을 마련, 초라한 "방배동시절"에서 화려한
"대치동 시절"을 맞고 있었다.
어찌 잘 되는 일만 맡을 수 있겠는가.
94년 박이사는 입사후 제2의 인생이라 할만한 일을 맡게 된다.
상반기 매출이 20억원에도 못미칠 정도로 "죽쑤던" 한 브랜드의 매출을
책임지라는 지시를 받고 1주일간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러자고 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에 마음이 동한 그는
불구덩이에 뛰어들었고 결국 회사의 목표치를 넘어 하반기 매출을
120억원으로 끌어 올렸다.
이 업적으로 "나산의 FIRE MAN"이 된 그는 94년 12월 입사 8년10개월만에
별을 땄다.
10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지옥과 천당을 화끈하게 경험한 박이사.
그는 자신처럼 출발선상에서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통, 외로움, 부모님들에 대한 송구스러움,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즐기세요.
그러나 높은 산까지도 다 잡아먹은 늪이 돼서는 안됩니다.
대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미약한 새똥에도 곧바로 반응을 하고 호수처럼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세요.
기회는 언제든지 오는 법입니다"
<윤성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