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1심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된데 대해 너무 관대하다는 반발도 적지 않고,
예견됐던 것 아니냐는 반응도 또한 없지 않다.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행위-역사에 맡기자-12.12기소유예-성공한
쿠데타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다-5.18특별법제정 등 역사바로세우기로
반전을 거듭한 끝에 이제 대법원의 법률심만 남겨놓은 단계까지 왔지만,
이것으로 과연 매듭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지...

정치적 법률적 측면에서도 되새겨봐야 할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경제
기자로서 나는 정치권력과 기업간 상관관계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노태우씨의 엄청난 비자금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현정권이 "성공한
쿠데타에는 공소권이 없다"는 시각을 바꿔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12.12와
5.18에 대한 사법처리에 나섰을지, 나는 확신이 가지 않는다.

전.노씨 등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비자금 때문에 더욱 악화, 특별법제정과
사법처리라는 지난 1년여간의 과정을 있게 했다고 본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인식은 좀더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형량에 못지 않게 이런 유형의 축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할 제도적 장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것이 당연하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돈이 들고 정치를 하는데 돈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지상의 수로를 따라 흘러야 할 물이 지하의 미로로 흘러서는
안된다.

뇌물이 이에 해당한다.

지상의 수로로 흘러야할 물이 지하의 미로로 흐르게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지상의 수로를 막거나 좁혀놓고 대신 지하의 미로로 물길을 열어놓은
사람이 져야할 것이다"는 판결문은 이 땅의 기업현실을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공 아래서 공중분해된 국제상사그룹의 양정모회장은 자신이 비행기시간이
늦어져 제 시간에 청와대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일해재단관련 모금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기업을 빼앗겼다고 국회청문회에서 주장했었다.

그의 주장을 100%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업이 정치권력
앞에서 더없이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이 추구해야할 제1차적인 덕목은 뭐니뭐니 해도 영속성이다.

쉽게 말해 부도를 내고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종업원과 거래업체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기업의 생사를 정치권력이 좌우하는 여건,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과의 야합이 불가피한 상황아래서 기업활동에 대해 절대적인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검찰과 재판부가 관련기업인들에 대한 기소를 줄이고 집행유예 등 관대한
처벌을 내린 것도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소나기오는 진흙탕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됐던 사람들에겐 흙탕물이
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관대한 처벌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법적 처벌이 어떻게되건 이번 사건이 우리 경제에 미칠 후유증은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좋지못한 국민들의 기업관을 더욱 왜곡시키는 꼴이 될 것은
물론이고 기업인들이 외국에 나가 활동하는데도 적잖은 장애가 될 것이
명확하다.

더이상 정치권력에 돈을 바치지 않더라도 기업을 할 수 있는 풍토가
돼야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땅의 본질적인 구조적 문제와 연관된 사안이기 때문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권의 도덕성만 강조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즉각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업헌금금지법"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기업명의의 정치헌금은 법으로 금지돼있기도 하다.

기업이 아니라 기업인 개인이라면 낼 수 있는 돈의 규모가 우선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법이 생긴다고 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 권력을 가진 자들의
요구가 줄어들리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업명의 헌금이 법으로 금지돼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업이
헌금을 거절하거나 줄일 수 있는 핑계가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볼만하다.

또 해묵은 문제인 기업의 준조세부담을 해결하는 방편도 될 수 있다.

연례행사화한 수재의연금 불우이웃돕기성금도 따지고보면 언제까지나
기업에 떠맡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낸다면 기업인이 내야 하고, 정부에서 더 부담해야 할 돈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추상적 확대해석이 기업부담을 가증시키는
것은 물론 부패 등 사회적비용을 부르지는 않았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기업헌금을 금지시킨다면 현행 기부접대비 한도도 비현실적으로 적은
편인데 그걸 없애라는게 말이 되느냐고 우선 기업관계자들이 반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얘기가 다르다.

헌금행위 그 자체를 전면 금지하거나 최소의 용도에만 허용한다면
"체면용 기부" 등의 부담이 원천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다.

"기업헌금=정치자금"이기 때문에 뇌물이 아니라는 전직 대통령 변호인들의
논리는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도 기업정치헌금은 제도적으로 금지할 필요가 있고, 이를
어긴 정치인은 응징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업헌금금지, 우선은 선언문에 그치더라도 제도화할 만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