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해가 저문다.

재계의 96년은 격동의 연속이었다.

연초까지만해도 이어질 것 같았던 활황경기가 하반기 들어서며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몸부림은 어느해은 어느해보다 처절해 "슬림화"
"리스트럭처링" "명퇴" 등과 같은 말이 널리 유행하기도 했다.

96년 재계 주요 이슈들을 시리즈로 엮어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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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전자 서울사무소에 근무하는 김과장의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3백50%의 특별성과급까지 받아 주머니가 두둑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 연말엔
정규보너스외엔 기대할 게 없다.

망년회마저 구내식당에서 갖는다는 연락을 받은 터다.

강남의 단란주점에서 값비싼 양주를 즐겼던 지난해 망년회는 꿈같은
지난얘기가 돼버렸다.

그래도 아직은 직장내에 명예퇴직바람이 불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가끔 목을 추스린다.

"불황"-.

올해 경제계의 화두는 단연 이 두글자다.

"명퇴"로 특징지워진 감원.감량경영의 소용돌이도 불황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연착륙이냐 경착륙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국경제는 불황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섬유 신발등 노동집약적 산업뿐 아니라 전자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업종이 경기후퇴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다.

불황의 깊은 골은 2백억달러선에 달한 무역적자폭으로도 읽혀진다.

사회전반의 과소비행태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론 산업의 경쟁력약화가
무역수지적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불황과 무역적자의 최대요인으로는 아무래도 반도체를 꼽지 않을수 없다.

"수출의 견인차" "신화를 낳은 마법의 돌"로 칭송받던 반도체가 올해는
"수출불효자"로 전락해 버렸다.

90년 45억달러에서 지난해 2백21억달러로 연평균 30%이상 뜀박질한 수출이
올핸 잘해야 1백80억달러에 머물 전망이다.

지난해보다 41억달러가 줄었다.

올초 수출예상치가 3백7억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무려 1백30억달러 가까운
수출차질을 빚은 셈이다.

돈줄 역활을 하던 반도체의 경기후퇴는 필연적으로 관련 그룹들의 투자를
위축시켰다.

지난해 경쟁적으로 늘렸던 복지예산이 깍이고 그룹전체 분위기가 썰렁하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올해의 불황이 반도체만의 책임은 아니다.

자동차업계도 내수둔화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늘어나는 재고부담을 덜기위해 업계는 지금 무이자할부판매라는 극약처방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철강부문의 재고증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건설자재로 쓰이는 H형강이나 철근의 재고량은 작년말에 비해 무려 80%
가까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전기로업체들은 최고 40%까지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

조선업계의 경우 일감(수주잔량)이 적정수준을 크게 밑돌아 고민이다.

엔화약세와 높은 임금등으로 인해 국제경쟁력면에서 일본업체들에 밀리고
있어서이다.

일부 중견조선소들은 종업원수를 줄이는 등 감량경영에 나서고 있다.

유화산업도 예외가 될순 없다.

지난해 외국 몇몇 대형업체의 사고여파로 이상특수를 누린 것도 잠시,
올들어서는 국제가격 폭락으로 상황이 급반전됐다.

대기업업종이 이 지경이니 중소기업들의 상황이야 더 말할 나위없다.

삼익악기 귀족등을 비롯한 수많은 중소 중견업체의 부도와 도산이 연중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경쟁력상실에 따른 위기감을 급기야 우리경제가 70~80년대의 남미형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심각한 논쟁을 유발했다.

아울러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고비용.저효율" 구조의 심각성이
강하게 제기돼 논란이 확산되기도 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의미한다.

불황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태어나냐
한다는 것을 절감할 때 자신에 찬 새해가 다가 올 것이다.

< 김낙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