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세모에 띄우는 편지 .. 박성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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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다.
어젯밤 이 영화를 비디오로 다시 봤다.
내용중 동성애와 폭력 장면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얘기는 이렇다.
성실하고 꼼꼼해 잘나가던 은행원 앤디는 바람난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언도받는다.
쇼생크감옥에 갇힌 앤디에게 희망은 없어 보인다.
"너희들의 목숨은 내게 달렸다"고 공언하는 비열하고 교활한 교도소장과
그 주구노릇에 혈안이 된 간수.
같은 죄수로부터 강요되는 동성애와 거부할 때마다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
그러나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듯한, 귀족적인 한편으로 소심해
보이는 얼굴의 앤디는 그 모든 것을 견딘다.
단지 참아낼 뿐만 아니라 도저히 달라질 수 없을 것같던 교도소내 상황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온갖 벌레만 들끓는 도서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앤디는 매주 시의회에
편지를 쓴다.
6년이 지나 온 첫 답장은 200달러와 헌책 몇권.
그리고 "제발 이제 편지를 그만 보내라"는 것이다.
앤디는 편지를 주 1회에서 2회로 늘리고 그 결과 마침내 음악도 들을 수
있는 도서실이 생겨난다.
앤디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육을 받지 못한 죄수들을 가르치고 간수들이 세금을 환급받도록 해준다.
또 악랄한 교도소장이 온갖 비리로 벌어들이는 돈을 세탁해준다.
우연히 젊은 죄수가 아내살인의 진범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교도소장에게 재심청구를 요구하지만 결과는 앤디를 평생 감옥에
묶어두려는 소장의 젊은죄수 살해로 나타난다.
죄수생활 20년.
앤디는 드디어 감옥에서 사라진다.
자신이 세탁해준 소장의 돈을 몽땅 가진채 체스말을 조각하는데 쓰던
손망치로 벽을 뚫고 탈출한다.
뿐인가.
교도소친구인 레드가 출옥후 적응을 못하고 자살할 것에 대비,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든다.
레드가 감옥에서 앤디가 일러준 장소를 찾아 발견한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희망은 좋은 거에요.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희망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어디서건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물론 이건 영화얘기다.
앤디의 탈출 성공과 비리폭로로 인한 소장의 자살은 3시간이 넘도록
가슴 졸이던 관객을 속시원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앤디는 극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주위사람들에 대한
사랑 또한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한편으로 모두가 포기해버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한다.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극악해도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속에서 함께 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한해가 저무는 이즈음 세상은 "아가야사건"으로 시끄럽다.
"7살짜리를 돼지우리에 가둔채 때려 죽였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보도내용도 있다.
사실여부야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초고속 정보통신사회에서도 사이비종교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끔찍한" 일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는 한편으로 아가동산 사람들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들 모두 쇼생크감옥의 죄수들처럼 바깥생활에 적응할 자신이 없어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는 걸까.
사이비종교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집단
생활이라는 사실은 이상하게 여겨지는 한편으로 혹시 우리 사회가 힘없는
개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탓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겨우 살만하다 여길 즈음엔 또다시 뭔가 먹구름이 닥치고, 딴에는 기껏
옳게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옆에서는 벌 받아 마땅할 듯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서의 희망을 버린 나머지 개인으로서의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까닭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상황이 개인의 자유와 희망을 앗아갈 수 있는가.
세상이 언제 만만한 적이 있었던가.
가장 무서운 건 상황이 아니라 자포자기가 아니던가.
한해를 보내며 우리 모두 새해에는 스스로를 믿고 용서하며 그럼으로써
이웃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언젠가 변화될 것을 믿고 그때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기를 기대한다.
나와 너 모두 "어쩔 수 없다" 대신 "신념은 기적을 낳고 훈련은 천재를
만든다"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뜀으로써 "시간이
가져다준 마술"을 만나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0일자).
어젯밤 이 영화를 비디오로 다시 봤다.
내용중 동성애와 폭력 장면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보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얘기는 이렇다.
성실하고 꼼꼼해 잘나가던 은행원 앤디는 바람난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종신형을 언도받는다.
쇼생크감옥에 갇힌 앤디에게 희망은 없어 보인다.
"너희들의 목숨은 내게 달렸다"고 공언하는 비열하고 교활한 교도소장과
그 주구노릇에 혈안이 된 간수.
같은 죄수로부터 강요되는 동성애와 거부할 때마다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
그러나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듯한, 귀족적인 한편으로 소심해
보이는 얼굴의 앤디는 그 모든 것을 견딘다.
단지 참아낼 뿐만 아니라 도저히 달라질 수 없을 것같던 교도소내 상황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온갖 벌레만 들끓는 도서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앤디는 매주 시의회에
편지를 쓴다.
6년이 지나 온 첫 답장은 200달러와 헌책 몇권.
그리고 "제발 이제 편지를 그만 보내라"는 것이다.
앤디는 편지를 주 1회에서 2회로 늘리고 그 결과 마침내 음악도 들을 수
있는 도서실이 생겨난다.
앤디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육을 받지 못한 죄수들을 가르치고 간수들이 세금을 환급받도록 해준다.
또 악랄한 교도소장이 온갖 비리로 벌어들이는 돈을 세탁해준다.
우연히 젊은 죄수가 아내살인의 진범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고
교도소장에게 재심청구를 요구하지만 결과는 앤디를 평생 감옥에
묶어두려는 소장의 젊은죄수 살해로 나타난다.
죄수생활 20년.
앤디는 드디어 감옥에서 사라진다.
자신이 세탁해준 소장의 돈을 몽땅 가진채 체스말을 조각하는데 쓰던
손망치로 벽을 뚫고 탈출한다.
뿐인가.
교도소친구인 레드가 출옥후 적응을 못하고 자살할 것에 대비,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든다.
레드가 감옥에서 앤디가 일러준 장소를 찾아 발견한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희망은 좋은 거에요.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희망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어디서건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물론 이건 영화얘기다.
앤디의 탈출 성공과 비리폭로로 인한 소장의 자살은 3시간이 넘도록
가슴 졸이던 관객을 속시원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앤디는 극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주위사람들에 대한
사랑 또한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한편으로 모두가 포기해버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한다.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극악해도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속에서 함께 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한해가 저무는 이즈음 세상은 "아가야사건"으로 시끄럽다.
"7살짜리를 돼지우리에 가둔채 때려 죽였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보도내용도 있다.
사실여부야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초고속 정보통신사회에서도 사이비종교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끔찍한" 일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는 한편으로 아가동산 사람들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들 모두 쇼생크감옥의 죄수들처럼 바깥생활에 적응할 자신이 없어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는 걸까.
사이비종교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집단
생활이라는 사실은 이상하게 여겨지는 한편으로 혹시 우리 사회가 힘없는
개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버거운 탓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겨우 살만하다 여길 즈음엔 또다시 뭔가 먹구름이 닥치고, 딴에는 기껏
옳게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옆에서는 벌 받아 마땅할 듯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서의 희망을 버린 나머지 개인으로서의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까닭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상황이 개인의 자유와 희망을 앗아갈 수 있는가.
세상이 언제 만만한 적이 있었던가.
가장 무서운 건 상황이 아니라 자포자기가 아니던가.
한해를 보내며 우리 모두 새해에는 스스로를 믿고 용서하며 그럼으로써
이웃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언젠가 변화될 것을 믿고 그때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기를 기대한다.
나와 너 모두 "어쩔 수 없다" 대신 "신념은 기적을 낳고 훈련은 천재를
만든다"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뜀으로써 "시간이
가져다준 마술"을 만나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