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 소설가 / 문학의해 조직위원장 >

한해를 돌이켜보니 갖가지 감회가 남는다.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는 의구한 권력 사회구나. 여기서 벗아나려면 아직
멀었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사람이 모여 살면 권력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이 권력이 매우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문명사회라 할수 있다.

법이나 "룰"을 어기지 않는한 권력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이상적
임은 물론이다.

권력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대중매체도 권력이고 문화적 권위도 권력일수 있다.

기업의 소유자나 경영자도 권력이다.

지금은 부부간에도 권력투쟁이 널리 진행중이다.

노동조합도 빼놓을수 없다.

흔히 돈과 권력은 분화돼야 한다고 하지만, 그 돈을 방어하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돈있는 사람들도 감투를 쓰려고 기를 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발선에 나온 말들은 흥분상태에서 다리 방아를
찧고 있다.

대중매체들은 반쯤은 놀려대는 어투로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다.

그래야만 잘 팔릴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대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봄바람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좀 의문스럽게 생각하니, 사람마다 누가 "대권"을 잡는 것이 내게
유리한가, 또는 최소한 불리하지 않은가, 주판을 튕기고 있는 듯도 하다.

나는 개인택시 기사에게 다소 아부하는 투로 건네었다.

"당신 팔자가 제일 좋소. 나는 평소에 개인택시 기사를 존경하오. 명예퇴직
당할 것도 없고 일한만큼 벌어 자주 독립을 하고 있으니 당신네는 당당한
성주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택시기사를 누가 알아준답니까"

"그런 소리 마시오. 대통령 부러울 것 없는 직이요"

"말씀이 나와서 말씀인데,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누가 하든지간에 경기가 나아져야지요"

더이상 화제는 진전되지 못했다.

두사람 모두 권력이 엿듣고 있을까 조심한 탓일 것이다.

또는 의견이 맞지 않아 피차 거북해지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권한을 분산하고 규제를 푼다고 입이 닳다록 말하지만, 백년하청 격이다.

그 알량한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게 본심들이기 때문이다.

시늉만 내본다고 알짠은 계속 틀어 쥐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높은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권력중에서 그중 상위에 있는 것이 정치권력임을 이래도 모르겠는가.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한해이기도 했다.

사직의 힘이 별게 아니라는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 셈이었다.

민간기업도 정부의 흉내를 내고 있는데, 연말의 대폭 인사가 그것이다.

어떤 때는 인사하는 재미에 그룹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기도 한다.

조선왕조는 대표적인 관료형 권력국가의 하나였다.

아무리 임금이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고 "규제"를 완화 혹은 철폐하려고
추상같은 명을 내려도 아전들에겐 도무지 먹혀들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사회에 형성돼 있는 크고 작은 권력의 방대한 생태계는 어떤 힘으로
파괴할수 없을 것이다.

아직 시간의 풍화작용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해야할 지경이다.

어찌된 노릇인지 사람들은 갈수록 권력의 분배에 달겨들고 있으며, 하다
못해 대용품도 좋으니 나도 가져야겠다고 운집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권력 생태계는 자연과는 달리 수직형처럼 보인다.

수평형으로 가져가는 것이 민주사회화일 터이다.

그러고보니 수직형의 극치가 북한사회 아닌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조선왕조(그리고 식민지)에서 곧장 관료형 권력사회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남한은 수십년간의 자율적 혹은 타율적인 학습을 했기에
지금 이정도나마 집안이 된것이다.

세련된 사회일수록 정치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않아도 된다.

또 정치권력 얘기는 너무 좋아하는 사회는 대개 낭비가 많다.

그러나 저러나 새해엔 정치의 꽃이 만개할 것이고 저마다 대권 중권
소권을 꿈꿀 것이다.

이글을 쓴 필자도 낭비에 일조를 한 셈인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