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창과창' 대표 윤창씨..'창을 여니 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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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 크리에이트(BORN TO CREATE)" "창과창"출판사 대표 윤창씨(33)는
자신이 "창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제 이름(창)을 보십시오. 그 자체로 창조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너스레가 그저 빈말(공)은 아니다.
윤사장의 명함은 모두 세장.
"창과창"외에도 "파피루스"출판사와 인터넷 서비스 회사인 "인터넷과
컴퓨터"의 대표다.
세회사 모두 탄탄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나이치곤 이른 성공.
여기엔 "창조적 정신"이란 밑거름이 있었다.
서울대 중문과 83학번.
대학시절부터 별난 아이디어가 넘쳐 개그계로 진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곤 했다.
하지만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윤사장은 졸업후 "평범하게도" (주)선경에
입사했다.
틀에 박힌 정형성, 엄격한 분위기.
종합상사는 그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2개월을 버티지 못한채 89년 겨울 회사를 뛰쳐나오고야 만다.
"이름값"을 해야겠다는 의지만을 뒷심삼아..
창조적인 일, 바로 광고였다.
하지만 광고회사의 공채기간은 이미 끝난지 오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지요"
우선 광고기초서적 30여권을 하룻만에 독파했다.
그리곤 다음날로 "왜! 윤창이 오리콤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대문짝만한
광고를 만들어 무작정 오리콤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로선 퍽이나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의 정성이 회사를 움직였던가.
그는 "특별케이스"라는 꼬리를 달고 AE로 전격 발탁된다.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대우전자에서 각종 광고를 따내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회사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꼽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후 한창 물이 오를 즈음, 윤사장은 또하나의 엉뚱한
일을 꾸민다.
"이왕 몸바쳐 일할 거라면 내사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91년, 덥석 "창과창"을 열었다.
손에 쥔 것은 이리저리 변통한 3천만원이 전부.
하지만 광고회사 다닐때 마케팅에 대한 자신감, 거기에 자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철학같이 어려운 사회과학 서적을 쉽고도 심도있게 풀어내는 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년동안은 대기업 사보를 찍으며 출판의 기본기를 닦았다.
92년 겨울, 드디어 첫작품을 내놓는다.
"서울대 본고사 국어 완벽대비".
의외다.
"우선 돈이 될 것을 내야 했거든요"
너털웃음..어쨌든 이 틈새시장 공략전략은 맞아떨어졌고 첫 작품은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그리하여 최초 매출 4억원.
시작치곤 대히트였다.
"창과창"은 국어 전문 출판사로 성장해 이젠 매출 15억원의 중견 출판사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렇다고 쉬운 철학 서적출판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지난 93년 단행본 중심 출판사인 파피루스를 인수했다.
"좋은 책을 꾸준히" 낸 덕분에 파피루스도 벌써 연간 순이익이 1억원에
달한다.
출판계의 만성적인 불황을 고려하면 튀는 성적이다.
윤사장의 상상력은 벌써 21세기를 달린다.
인터넷 회사를 연 것은 바로 다가올 전자출판 시대를 대비한 것.
정보의 망망대해에서 정보를 그저 낚아올리는 것이 아니다.
마케팅을 양념으로 맛깔나게 요리한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다.
이외에도 카피라이터, 사진작가, 디자이너등 전국에 산재한 전문
프리랜서의 정보를 한곳에 담는 "프리랜서 네트워크"를 구축중이다.
"인터넷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1인 1PC세상이 오면 누구나 고급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정보의 기회균등.
그가 가진 궁극적인 꿈이다.
끝으로 한마디 맺는 말이 AE출신답다.
"모두가 헤엄치는 정보의 바다.
윤창이 만들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8일자).
자신이 "창조"를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이다.
"제 이름(창)을 보십시오. 그 자체로 창조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너스레가 그저 빈말(공)은 아니다.
윤사장의 명함은 모두 세장.
"창과창"외에도 "파피루스"출판사와 인터넷 서비스 회사인 "인터넷과
컴퓨터"의 대표다.
세회사 모두 탄탄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나이치곤 이른 성공.
여기엔 "창조적 정신"이란 밑거름이 있었다.
서울대 중문과 83학번.
대학시절부터 별난 아이디어가 넘쳐 개그계로 진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곤 했다.
하지만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윤사장은 졸업후 "평범하게도" (주)선경에
입사했다.
틀에 박힌 정형성, 엄격한 분위기.
종합상사는 그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2개월을 버티지 못한채 89년 겨울 회사를 뛰쳐나오고야 만다.
"이름값"을 해야겠다는 의지만을 뒷심삼아..
창조적인 일, 바로 광고였다.
하지만 광고회사의 공채기간은 이미 끝난지 오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지요"
우선 광고기초서적 30여권을 하룻만에 독파했다.
그리곤 다음날로 "왜! 윤창이 오리콤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대문짝만한
광고를 만들어 무작정 오리콤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로선 퍽이나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의 정성이 회사를 움직였던가.
그는 "특별케이스"라는 꼬리를 달고 AE로 전격 발탁된다.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다.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대우전자에서 각종 광고를 따내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회사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꼽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후 한창 물이 오를 즈음, 윤사장은 또하나의 엉뚱한
일을 꾸민다.
"이왕 몸바쳐 일할 거라면 내사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91년, 덥석 "창과창"을 열었다.
손에 쥔 것은 이리저리 변통한 3천만원이 전부.
하지만 광고회사 다닐때 마케팅에 대한 자신감, 거기에 자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철학같이 어려운 사회과학 서적을 쉽고도 심도있게 풀어내는 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년동안은 대기업 사보를 찍으며 출판의 기본기를 닦았다.
92년 겨울, 드디어 첫작품을 내놓는다.
"서울대 본고사 국어 완벽대비".
의외다.
"우선 돈이 될 것을 내야 했거든요"
너털웃음..어쨌든 이 틈새시장 공략전략은 맞아떨어졌고 첫 작품은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그리하여 최초 매출 4억원.
시작치곤 대히트였다.
"창과창"은 국어 전문 출판사로 성장해 이젠 매출 15억원의 중견 출판사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렇다고 쉬운 철학 서적출판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지난 93년 단행본 중심 출판사인 파피루스를 인수했다.
"좋은 책을 꾸준히" 낸 덕분에 파피루스도 벌써 연간 순이익이 1억원에
달한다.
출판계의 만성적인 불황을 고려하면 튀는 성적이다.
윤사장의 상상력은 벌써 21세기를 달린다.
인터넷 회사를 연 것은 바로 다가올 전자출판 시대를 대비한 것.
정보의 망망대해에서 정보를 그저 낚아올리는 것이 아니다.
마케팅을 양념으로 맛깔나게 요리한 고급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다.
이외에도 카피라이터, 사진작가, 디자이너등 전국에 산재한 전문
프리랜서의 정보를 한곳에 담는 "프리랜서 네트워크"를 구축중이다.
"인터넷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1인 1PC세상이 오면 누구나 고급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정보의 기회균등.
그가 가진 궁극적인 꿈이다.
끝으로 한마디 맺는 말이 AE출신답다.
"모두가 헤엄치는 정보의 바다.
윤창이 만들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