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저문다.

이른바 송년이다.

말도 탈도 많았던 망년회도 지금쯤이면 막바지에 이를 때다.

직장모임 친구모임 동창생모임등에 줄줄이 참석, 술 몇잔에 노래 몇곡
부르고 나면 한해가 가고 한살 더 먹게 됨을 실감하는게 우리네 보통사람들
의 연말얘기다.

그런데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 있는 "회장님"들의 망년회는 어떨까.

망년회장에서 으레 있을 법한 노래솜씨는.

또 18번은.

그러나 알고보면 회장님들의 망년회는 오히려 보통 샐러리맨에 비해서
단촐하고 더 검소한 경우가 많다.

회사 임직원들과의 망년회는 저녁식사를 겸한 간담회가 보통이다.

대외행사일 경우라도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 동문 모임정도가 고작이다.

시끌벅적한 모임에서 마음놓고 취하고 떠들기는 남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쉽지 않다는게 회장실 측근들의 설명이다.

망년회하면 으레 약방의 감초격으로 따라다니는게 "노래".

회장이 주재하는 망년회에 참석할 경우 운이 좋으면 "회장의 18번"을 들을
수도 있다.

특히 세대교체가 이뤄진 회장들의 경우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노래도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웅렬 코오롱그룹회장.

직원들과 회식을 끝내고 포장마차를 들르기도 하며 흥이 나면 노래방을
찾아 "슬픈 언약식"등 신세대 노래도 부를만큼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최근 회장직을 승계한 정몽원 한라그룹회장도 이에 못지 않다.

노래를 좋아하고 특히 신곡은 카세트 테이프를 들어가며 일일이 배우는
"노력형"이다.

정몽구 현대그룹회장은 올해 그룹 회장실 직원들과는 특별한 망년행사를
안갖기로 했다.

술은 약하지 않지만 노래는 웬만해선 부르지 않는다.

억지로 시키면 마지못해 부르는 곡이 "칠갑산".

18번인 셈이다.

이건희 삼성그룹회장도 노래엔 약하다.

그룹 사장단들조차 이회장 노래를 들어본 이가 많지 않다.

올해초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그룹 전략회의를 끝내고 이회장이 주재한
술자리에선 부인 홍라희여사와 노래를 같이 부를 기회가 있었다.

곡목은 "만남".

구본무 LG그룹회장은 매년 연말 트윈빌딩에서 회장실 임직원들과 저녁식사
를 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망년행사를 대신한다.

이자리에선 간단한 식사와 주류가 제공되며 2차는 없다는게 그룹 관계자의
전언.

구회장도 노래를 즐겨부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18번은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그것이다.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은 해외에서 연말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올해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유럽지역의 현지 주재원들과 망년회를 대체하는 식사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망년행사를 갖더라도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선 "어머님 은혜"를 부르는 정도.

조석래 효성그룹회장은 와세다대학 한국동창회장을 겸하고 있어 매년
한국내 와세다대학 동문들의 송년모임을 주재한다.

조중훈 한진그룹회장은 가족들과 조용히 망년회를 보내는게 전통.

어지간한 송년 모임의 참석은 장남인 조양호 대한항공 부회장이 맡고 있다.

이순국 신호그룹회장은 매년 회사직원들과 공식적인 망년회를 사무실에서
갖는다.

맥주와 간단한 다과가 제공되며 2차로 사우나에 가기도 한다.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즐겨하는 편으로, 새로운 노래가 나오는대로
가사를 줄줄 꿰는 그의 신곡편력(?)은 알만한 사람은 다아는 얘기다.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