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장 책임이 아닙니다.

계속 맡아주세요"

"아닙니다.

1천명을 내보낼 정도로 경영을 방만하게 한 건 제 책임입니다.

그만 두겠습니다"

정기인사를 하루 앞둔 지난 26일 선경그룹 대회의실.

퇴사하겠다는 김준웅 선경인더스트리 사장과 그를 말리는 최종현 그룹회장
등 경영진들은 한참동안이나 승강이를 벌였다.

결국 다음날 인사에서 김사장은 32년간 입어온 "선경맨"의 옷을 벗게 됐다.

김준웅 선경인더스트리 사장-.

올 하반기 회사원들의 목을 한껏 움츠리게 했던 "명예퇴직"의 불길을 당긴
인물이다.

지난 9월 2차례에 걸쳐 9백28명을 내보낸 선경인더스트리의 명예퇴직
이후 한국유리 등이 잇달아 이 제도를 실시하면서 그는 본의아니게 명퇴의
주도자가 돼야했다.

선경인더스트리 관계자는 "평소 경영모토를 "한솥밥 한식구"로 정해
인화를 강조해 온 김사장이 명퇴 실시 이후 식사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한양대 섬유공학과 출신으로 지난 65년 선경합섬에 입사한 김전사장은
30여년을 공장 등 현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지냈다.

별명이 "독일병정"일 정도로 일처리가 깐깐하지만 수원공장 공장장으로
근무할 때는 공장 근로자들의 이름은 물론 신상명세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자상한 면이 많았던 전문경영인이다.

사장에 취임하고도 짬짬이 공장에 내려가 생산직 근로자들과 축구 등
운동을 함께 즐긴 것도 공장장시절 맺은 끈끈한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특히 노조와의 관계가 돈독해 노조의 요구는 경영에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한 다 들어줬다.

"노조원들도 같은 직원이데 이들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경영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이뤘다.

그가 공을 들인 인도네시아 현지법인인 선경끄리스는 일본의 쟁쟁한
업체를 제치고 공장 완공 3년만에 현지 고급섬유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선경 인사담당자는 "여러가지 면에서 몇년은 더 사장을 맡았어야 할 인물"
이라면서 "먹고살기가 궁해 식구를 쫓아내야만 하는 가장의 마음을 상상하면
김전사장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부터는 몫돈을 퇴직장려금으로 주는 명예퇴직은 기대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런 점에서 "최고 60개월치의 퇴직금을 더 주었던
선경인더스트리 명예퇴직은 "한솥밥 한식구"의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손상우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