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때의 고승이었던 도언은 1004년 석가 이래의 역대 법맥과
법어를 수록한 "전등록"이라는 불서를 저술해 세상에 남겨 놓았다.

그 가운데 "아깝도다 용두를 휘날리더니 사미로 끝나더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흔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용두사미"라는 명언이
생겨났다.

어떤 일이 처음엔 요란하게 기세가 올려지다가 나중엔 그 세가 꺾이어
흐지부지된다는 뜻이다.

정부가 지난 91년부터 해마다 문화예술분야의 장르별 해를 지정하여
그 확산과 육성에 주력해온 사업도 용두사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해가
적지 않았다.

되돌아 보건대 시발연도의 "연극.영화의 해", 92년도의 "춤의 해",
93년도의 "책의 해", 94년도의 "국악의 해", 95년도의 "미술의 해",
96년도의 "문학의 해"가 줄곧 이어졌지만 어느 하나도 기대에 걸맞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둔 해는 없었다.

다만 관객 부재에 허덕여오던 연극분야만이 저변 확대에 큰 수확을
거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춤과 국악 공연 횟수의 급증, 미술전시회의 증가, 독서운동의 적극적
전개 등으로 그 관심도 제고에 기여한바 없지 않았으나 고질적 병폐를
드러내 실망을 안겨 주기도 했다.

무용계 일부 주축 교수들의 대학입시 부정사건 연루, 국악계의 해묵은
파벌싸움등이 계획된 행사를 무산시켰는가 하면 출판계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풍토를 불식시켜 버리지 못했다.

또 미술과 문학의 해는 주최측의 기획력 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민간활동에 의존하는 무능력을 드러냈다.

직설적으로 얘기한다면 영화를 비롯 춤 국악 문학등의 해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채 한해를 보낸 것이나 다름 없었다.

더욱이 소기의 성과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도 못한 집행위원회의
관련자들이 훈장이나 표창을 받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정부는 97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하고 "민족의 얼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는 표어 아래 36개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고 한다.

지난 6년동안 되풀이됐던 용두사미의 전철을 밟지 말고 내실있는 해로
마무리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