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의 면담 예약시간인 3시에 서른살이 넘어 보이는 환자가 그녀의
데스크 앞에 깊이 머리를 숙여서 절을 하며 앉는다.

처음 온 환자였다.

우울증에 걸려 있는듯 암울한 표정때문에 공박사까지 우울해진다.

"선생님 드디어 저의 와이프가 가출을 했습니다"

그런 일은 경찰에 가실 일이 아닌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부드럽게 웃으며 편하게 말을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한다.

"저는 요새 잠을 못잤습니다.

잠이 안와요.

와이프가 자꾸 나를 두고 도망치려고 해서 였습니다.

재즈카페의 색소폰 연주자와 도망친것 같아요"

"와이프는 언제 집을 나갔지요?"

"어제 퇴근을 하고 일찍 돌아왔더니 없어요.

한마디 메모도 없고 가지고 간 것도 없어요.

결혼반지도 그대로 있구요.

은행 통장에서도 한푼도 인출을 안했어요.

너무 이상합니다.

선생님 제가 온 것은요,제가 좀 잠들고 싶어서예요.

우선 좀 자야될것 같은데 잠이 안와요.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이 안와요"

그 남자의 얼굴은 까맣게 타서 거의 푸른빛이 돈다.

그녀는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수면제는 무엇을 드셨는지 수면제 이름을 알고 있어요?"

"유니솜이라고 미제인데 깨어날때 기분이 상쾌해서 가끔 복용하던 것인데
지금은 그것도 안들어요.

새벽에 두알이나 먹었는데 결국은 못잤어요.

미국약도 안들어요"

"미국약이 만능은 아니죠"

공박사는 미제 애호가들을 가끔 비웃어 준다.

그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들어 공박사를 바라본다.

딱하게도 이 환자는 지독한 불면증에 걸린것 같다.

그녀는 신경안정제를 수면제와 혼합 처방을 해서 잠을 재워볼까
생각해본다.

그녀에게는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 민박사가 보내준 신경안정제와 두통
치료제들이 지금 약장에 가득하게 있다.

요새는 잘 안쓰는 약으로부터 최신식 두통약까지 바로 며칠전에 미국에서
인편에 보내온 약들이다.

그 친구도 미국에서 신경정신과 개업의 였으므로 공박사는 큰 덕을 보며
환자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선진국의 우수한 치료약이야말로 병을 고치는 처방중에서도 으뜸의
방법이 아닌가?

공박사는 노트 가득하게 적혀 있는 새로운 약들의 이름을 흐뭇하게
읽어내려간다.

벤젠 다이애저펌 클로랄하이드레이트 아모바비탈 바르비투우르산염
퍼페나진 티오리다진 프라닐 탈윈 틸록스 롬트리올 퍼큐피트롤 나다닐
히가트릴 클리맥신 오버코마틀 힐록스 등등 그녀는 그 약명들을 읽다가
머리가 우직 우직 아파진다.

사뭇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이 온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