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제사회와 문무의 조화 .. 정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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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여 살면서 스스로의 안전을 위하여 군을 조직했고 군은 가장
큰 조직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군은 인류문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어온 거대 조직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으로 사회가 다양화되어 많은 민간조직이 탄생되었다.
민은 문으로, 군은 무로 특정지어지지만 군에서 뿐만 아니라 민에서도
문과 무를 겸비한 사람을 인재라 했다.
인재는 스스로도 열심히 공부하며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도 있다.
문과 무는 필연적으로 서로 보완관계이다.
병약자가 기능을 제대로 못하듯 군의 기능이 잘못될 때 민이 불행한
수난을 당한다.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 이를 체험해왔다.
최근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1천년전 문화의 유적 "앙코르 와트
(Ankorwat)"신전을 보고 찬란했던 옛 문화에 감동을 받았으나, 다음날
지식인과 공직자들을 무더기로 학살해 집단매장했던 살상광장(킬링필드)을
보고는 그 미개성과 야만성에 전율을 느꼈다.
1천년전에 찬란한 문화를 일으킨 문화민족이 현대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민족살상을 할 수 있었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문과 무의 관계에 새삼 회의를 갖게 됐다.
그런 혼란스런 상태에서 북한 대사관과 이웃한 캄보디아 훈센총리의
관저에서 저녁 만찬을 3시간동안 함께 하게됐다.
양국의 역사는 물론 한국동란때 이북정권에 의한 지식인과 공직자의
강제납북과 동족학살의 역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캄보디아를 찾기 얼마전 북한에서 공비들이 침투해 양민을 학살하고
군대가 그들을 소탕하는 소식을 전하는 언론보도는 역사가 아닌 현실이었다.
혹시나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전역이 살상광장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떨렸던게 사실이다.
훈센총리는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즈의 대부분이 정부에 투항하고 있어
더이상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북관계와 군과 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포 고문 부패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례를 들어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론이 있다.
여기에 대입하면 우리나라는 군출신 대통령중 한 분은 재임시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총탄에 세상을 하직했고, 그 후의 두 대통령은
영어의 몸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군사력증강을 위한 군비는 반생산적인 존재이다.
소련의 경제위기와 미국의 경제적 주도권 후퇴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고
발전도상국, 특히 남미에서 경제발전이 실패한것도 군비확장 탓이 크다.
군사적으로도 군비는 의미가 없다는 논리가 있다.
우리의 경제개발은 민수산업부터 시작하여 그 성장을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일으켜왔다.
반면에 북한은 군수산업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 파탄과 굶주림 경제를
이어가고 있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군비에서 율곡사업같은 과거의 체제는 무너졌지만 지난해 공비침투사건으로
안보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예산이 증액되고 새로운 군비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에따라 남북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 나라들의 일반논리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수 없음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을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혁명이 군을 국가의 교육기관으로 정의한 이래 모택동시대의
중국과 남미 등 많은 국가에서 군의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군이 국가의 교육기관이라는 주장은 신병들이 기술, 규율,
위생관념, 노동습관 등을 전혀 모르는 영세농민의 무식한 아들들이었던
시대의 유물일 뿐 군은 이미 국가의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제2차 대전후 창설된 군은 6.25전쟁과 월남전쟁을 비롯해
간첩소탕 등 본연의 전투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농경문화에 찌들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문맹퇴치는 물론 조직생활의 규율과 도시생활의 윤리 등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산업역군으로 육성하였다.
그들이 제대후에 국가산업 각 분야에 공헌하여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우리의 경제를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전에 두도록 성장시켰고, 스스로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데 군의 역할이 컸던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군을 국민의 교육기관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군이 앞으로도 묵묵히 인력이 부족한 미래 정보사회에 선도적인 인물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장으로서의 기능과 부모와 사회의 과보호로 나약해지기만
하는 젊은이들의 체력단련장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남북이 대치하고, 헌법에 국토방위의무를 정하여
누구나 군복무를 해야한다.
군을 음악 미술 기술등 각 분야의 인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문화를 선도해갈
든든한 젊은이들로 키워내는 메카의 역할로 승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나라에서나 민과 군이 서로 돕고 보완적 조화를 이룰 때 역사는
발전한다.
사회의 안정과 젊은이들의 건강한 정신과 체력이 나라의 미래경제를
선진국으로 발전시키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경영자의
속좁은 생각이라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6일자).
큰 조직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군은 인류문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어온 거대 조직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으로 사회가 다양화되어 많은 민간조직이 탄생되었다.
민은 문으로, 군은 무로 특정지어지지만 군에서 뿐만 아니라 민에서도
문과 무를 겸비한 사람을 인재라 했다.
인재는 스스로도 열심히 공부하며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도 있다.
문과 무는 필연적으로 서로 보완관계이다.
병약자가 기능을 제대로 못하듯 군의 기능이 잘못될 때 민이 불행한
수난을 당한다.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 이를 체험해왔다.
최근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1천년전 문화의 유적 "앙코르 와트
(Ankorwat)"신전을 보고 찬란했던 옛 문화에 감동을 받았으나, 다음날
지식인과 공직자들을 무더기로 학살해 집단매장했던 살상광장(킬링필드)을
보고는 그 미개성과 야만성에 전율을 느꼈다.
1천년전에 찬란한 문화를 일으킨 문화민족이 현대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민족살상을 할 수 있었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문과 무의 관계에 새삼 회의를 갖게 됐다.
그런 혼란스런 상태에서 북한 대사관과 이웃한 캄보디아 훈센총리의
관저에서 저녁 만찬을 3시간동안 함께 하게됐다.
양국의 역사는 물론 한국동란때 이북정권에 의한 지식인과 공직자의
강제납북과 동족학살의 역사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캄보디아를 찾기 얼마전 북한에서 공비들이 침투해 양민을 학살하고
군대가 그들을 소탕하는 소식을 전하는 언론보도는 역사가 아닌 현실이었다.
혹시나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전역이 살상광장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떨렸던게 사실이다.
훈센총리는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즈의 대부분이 정부에 투항하고 있어
더이상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북관계와 군과 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포 고문 부패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례를 들어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론이 있다.
여기에 대입하면 우리나라는 군출신 대통령중 한 분은 재임시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총탄에 세상을 하직했고, 그 후의 두 대통령은
영어의 몸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군사력증강을 위한 군비는 반생산적인 존재이다.
소련의 경제위기와 미국의 경제적 주도권 후퇴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고
발전도상국, 특히 남미에서 경제발전이 실패한것도 군비확장 탓이 크다.
군사적으로도 군비는 의미가 없다는 논리가 있다.
우리의 경제개발은 민수산업부터 시작하여 그 성장을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일으켜왔다.
반면에 북한은 군수산업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경제 파탄과 굶주림 경제를
이어가고 있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군비에서 율곡사업같은 과거의 체제는 무너졌지만 지난해 공비침투사건으로
안보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예산이 증액되고 새로운 군비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에따라 남북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 나라들의 일반논리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수 없음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을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혁명이 군을 국가의 교육기관으로 정의한 이래 모택동시대의
중국과 남미 등 많은 국가에서 군의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군이 국가의 교육기관이라는 주장은 신병들이 기술, 규율,
위생관념, 노동습관 등을 전혀 모르는 영세농민의 무식한 아들들이었던
시대의 유물일 뿐 군은 이미 국가의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제2차 대전후 창설된 군은 6.25전쟁과 월남전쟁을 비롯해
간첩소탕 등 본연의 전투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농경문화에 찌들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문맹퇴치는 물론 조직생활의 규율과 도시생활의 윤리 등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산업역군으로 육성하였다.
그들이 제대후에 국가산업 각 분야에 공헌하여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우리의 경제를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전에 두도록 성장시켰고, 스스로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데 군의 역할이 컸던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군을 국민의 교육기관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군이 앞으로도 묵묵히 인력이 부족한 미래 정보사회에 선도적인 인물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장으로서의 기능과 부모와 사회의 과보호로 나약해지기만
하는 젊은이들의 체력단련장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남북이 대치하고, 헌법에 국토방위의무를 정하여
누구나 군복무를 해야한다.
군을 음악 미술 기술등 각 분야의 인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문화를 선도해갈
든든한 젊은이들로 키워내는 메카의 역할로 승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나라에서나 민과 군이 서로 돕고 보완적 조화를 이룰 때 역사는
발전한다.
사회의 안정과 젊은이들의 건강한 정신과 체력이 나라의 미래경제를
선진국으로 발전시키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경영자의
속좁은 생각이라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