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주식투자를 하려면 굳이 BZW등 증권 전문회사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바클레이즈 로이즈등 인근 시중은행 지점을 찾아가면 펀드수익률등 주식
투자에 관한 자문도 받을 수 있다.

생명보험등 다양한 보험상품을 취급하는 은행도 많다.

증권회사도 예금및 대출등 시중은행의 고유기능을 하기도 한다.

"금융업체간 취급하는 금융상품의 차이는 회사의 영업전략에 따른 것이지
정부의 업종규제 때문은 아니다"는게 한국은행 런던사무소 양성륭 조사역의
지적이다.

영국인들은 하나의 금융회사에서 예금을 하고 주식도 사는등 이른바
"원스톱 뱅킹"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10년여전 단행된 금융대개혁의 선물
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빅뱅이라 불리는 금융대개혁은 고객의 예금을 보관하거나 주식을
사주는 소극적 관념에 빠져 있는 영국 금융회사들에 "고객정보의 종합관리"
란 개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사실 런던의 금융중심가인 시티는 그때까지만해도 세계금융계를 지배해온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 79년 외환규제를 철폐한후 대규모자금이 뉴욕증시로 이탈
하면서 런던증시는 내리막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뉴욕증시가 70년대 중반 이후 규제완화를 실시, 증권거래비용이 대폭
절감되자 런던의 자금이 그곳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영국정부는 지난 86년 10월27일 금융서비스법의 제정을 계기로
주식을 중개하는 브로커와 직접거래에 나서는 딜러로 양분돼 있는 증권업의
영역구분을 없애고 거래수수료및 증권사소유 제한을 폐지하는등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규제를 과감히 철폐해 나갔다.

국제화시대에 규제는 곧 경쟁력상실과 직결된다는 현실 인식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파장은 정부당국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당초 증권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시작된 금융개혁은 영국 금융
산업 전반으로 파급되면서 시티의 변신을 촉진시킨 것이다.

그 하나가 대규모 금융그룹의 탄생이다.

증권거래소의 비회원사가 회원사를 소유할 수 있는 은행.증권 겸업허용은
금융업에 대한 진입자유화로 발전돼 영국은행들은 보험 연기금 투자신탁등
다양한 업종의 자회사를 소유하는 "금융 그룹화"에 나서게 된다.

내셔널웨스트민스터은행은 증권회사는 물론 생명보험 신용카드 주택금융
팩트링등 금융관련 30개 자회사를 거느리는 금융재벌로 발돋움했다.

영국 4대 시중은행중 하나인 바클레이즈는 브로커인 드조에트앤드베번사와
딜러전문인 웨드덜라처스모돈트사를 인수, BZW를 만들었다.

영국계 최대 증권사인 BZW도 한마디로 빅뱅의 산물인 셈이다.

"빅뱅 직후 시티에 조버(JOBBER,딜러)란 용어가 사라지고 증권거래소
바닥에서 고함을 치는 대신 전화로 주식거래를 하게됐다"는 SBC 와버그사
앤디 로스 거래원의 회고처럼 컴퓨터등을 동원한 금융거래및 금융기법의
현대화도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빅뱅으로 변화에 적응 못한 상당수 영국계 금융회사들이 외국인 손에
잇따라 그 소유권을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나 미국및 일본계
금융업계의 런던진출이 본격화돼 시티의 위상을 높여주는 효과도 나타났다.

이제 빅뱅이 낙후돼가는 런던금융가를 세계 중심지로 복원시킨 원동력이
된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국내 금융시장규모가 미국의 5분의 1에 불과하면서도 런던외환시장의 하루
거래규모가 뉴욕의 2배 수준인 4천6백억달러에 이르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빅뱅 10주년 기념식에서 "용기있는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런던 증권거래소의
존 켐프-웰치회장의 평가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게 현지의 공통된 견해이다.

[ ''런던 시티'' 어떤 곳 ]

런던의 시티는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해당한다.

시티는 약 85만평정도의 면적으로 여의도와 크기가 비슷하디.

영국 중앙은행인 뱅크오브잉글랜드를 중심으로 6백여개 유수한 국제
금융기관이 밀집돼 있는 세계금융센터로 우리나라 19개 금융기관도 이곳에
진출해 있다.

시티내 금융인은 32만명으로 1인당 하루 평균 1백40만달러(11억5천만원
상당)의 외환을 거래하는 세계 최대 큰손들.

총고용인원은 75만명 정도로 런던 GDP의 39%를 이곳에서 생산, 영국경제의
동맥역활도 하고 있다.

< 브뤼셀=김영규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