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경제운영계획을 보면 영판 대입논술고사 모범답안이다.

안정기조 유지, 경제체질 강화, 구조개선, 인위적 경기부양책 불가...

마치 초등학교 5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의 한 토막을 옮겨 놓은 것 같다.

흔히 하는 식으로 가르자면 보이스카웃형 이라고나 할까.

잘해 보자는 다짐도 있고, 착실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있다.

옳은 일만 골라서 시키려는 성실성도 보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가르침"에 달리 할 말은 없다.

경제의 체력이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서 이것저것 무리를 감행하라는 건
말도 아니다.

환자에게 운동시합을 시키자는 꼴이니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길게 내다보고 기초체력을 다지는 데 주력하자는 것도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경제주체들이 위험한데로 빠질까봐 걱정하는 것도 이해할만 하다.

한데 방향도 제대로이고 내용도 옳기만한 운영계획을 보면서 다들 허전함
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안정"이 아니라 "안전"이 강조됐기 때문이다.

보이스카웃 야영장에 모이면 어린애들에게 제일 먼저 귀가 아프게 강조
하는게 있다.

바로 안전이다.

이것은 너무 위험하니까 안되고, 저것은 좀 더 큰 뒤에 하는 일이니까
하지말고...

금융개혁만 하더라도 그렇다.

부총리는 "빅뱅식의 금융개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러 설명한 뜻은 안다.

금융기관들이 안절부절 못하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안심시키려는 뜻일
게다.

하지만 보이스카웃 야영장에 보인 소년단원들처럼 이 말엔 물어볼 게 많다.

그러면 우리는 빅뱅을 말아야 하는 걸까.

그게 그렇게 위험하고 좀 더 큰 뒤에 해야 하는 걸까.

1백년 동안 단 한개의 은행만이 망한 일본은 왜 빅뱅을 서두르는 걸까.

영국은 그렇게 위험한 걸 왜 했을까.

물론 어슬아슬 하기는하다.

애들이 천방지축으로 놀면 다치기 십상이다.

까딱하다간 목숨이 위태로와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은행들은 애가 아니다.

많이 컸다.

일부 합작은행에선 대주주간에 지분경쟁을 벌이고 있다.

잘나가는 선발은행들은 누구와 합병하는게 가장 궁합이 잘 맞는지에 대한
검토까지 끝내놓고 있다.

여기에다 비상임이사제가 시행되면 대주주들이 은행경영에 참여해 목청을
높이게 돼 있다.

정부가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기들끼리 연애해서
애들 낳고 살아보겠다고 나설만한 상황이 되가고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재정경제원이 부모노릇을 하려드는 데 질려있는게 바로 금융
기관들이다.

정부가 나서서 안살겠다는 걸 강제로 짝을 지어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 판국에 굳이 "빅뱅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긋는 것도 사족이다.

마치 위험한 일이니 하지 말라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융 말고도 그렇다.

국제수지를 잡기위해 조기유학을 막는다고 한다.

이건 부모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싹수가 안보이는 애를 국내에서 망치는 것보다 내보내서 다른 세상을 보게
할 수도 있다.

역으로 재능있는 아이를 일찌감치 내보내 큰 물에서 놀게 할 수도 있다.

이쯤되면 집안일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자상한 정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데나 껴드는 막무가내 정부다.

그렇기도 하려니와 급하다고 창고 문 앞에서부터 물건을 싸놓는 꼴이기도
하다.

요즘 "산업구조 조정"이라는 단어가 경제계의 관심거리다.

이번엔 어느 기업을 누구에게 넘기려는 것일까 하는데 촉각이 맞추어져
있다.

워낙 못하는 일이 없고 참견 안하는게 없으니 정부가 휘두를 칼날의 향방
이 궁금할 수 밖에 없다.

경제운영계획이나 정책들의 내용이 부실하다거나 잘못 됐다는 게 아니다.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는 얘기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고 교역규모가 세계에서 열두번째로 많은
나라의 경제를 "부뚜막에 앉혀놓은 애"처럼 보지 말라는 말이다.

오늘의 정부는 더이상 옛날같은 무소불위의 정부가 아니다.

그러기를 바라는 이도 없다.

개혁을 하려거든 금융이나 노사관계보다 정부부터 할 노릇이다.

보이스카웃 야영대회 처럼 일렬종대로 구호를 맞춰가며 가게 해야 한다는
시각을 버리라는 충고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