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에세이] 행복한 관객..박춘호 <삼성영상사업단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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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의 성격상 크고 작은 연주회와 공연에 자주 참석한다.
꼭 보고싶은 공연도 많지만 기획한 사람이나 연출자와의 친분 때문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가서 출석부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 공연에 대해 나같은 동업관계자들의 반응을 적잖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같고 나 또한 그들 작품의 완성도와 출연자들의 기량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는 기회도 돼 영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공연에서는 1막후 또는 중간 휴식시간에 칭병을 하거나 다른
구차한 이유를 대면서 초대한 분께 양해를 구하고 돌아와 버리기도 한다.
예산부족이나 맞지 않는 수지타산등 어려운 제작환경을 감안하더라도 기획
준비과정에서 전문성이 결여되거나 안목이 부족한 공연의 경우다.
예술적 향기나 감동 아니면 최소한 시청각의 즐거움도 느끼기 힘들때
공연장을 빠져 나오며 나는 계속 객석에 남아 있는 참을성있는 많은 관객을
쳐다본다.
사실 우리 청중들은 고마울 정도로 너그럽다.
이미 낸 비싼 관람료 때문인지 우리 민족 특유의 이해심 덕인지 여하튼
우리 관객들은 아무리 미흡한 공연이라도 끝까지 봐주는 것은 물론
박수에도 인색하지 않다.
바로 이런 고객들의 너그러운 관람태도야 말로 공연장시설등 기본적인
"공연 인프라"의 부족과 능력있는 출연자, 창작인력의 기근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제작관계자들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박수없는 냉담한 객석, 공연중간에
일어나거나 심지어 야유하는 관객을 만나게 될 때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년에 뮤지컬 "42번가"를 공연할 때의 일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와의 최초 제작협력 작품으로 흥행에서도 꽤 성공적이었다.
어쭙잖은 미국문화의 이식이라는 등 일부 비평가의 매서운 질책이 있었고
엄청난 제작비로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던 공연이었다.
통역요원을 포함한 우리 제작진과 배우, 미국의 스태프들은 발목이 삐도록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결과는 곧 개막무대에서의 관객반응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의 "신데렐라"플롯 리듬감 탭댄스의 흥겨움등은 상대적으로 신바람
의 기회가 적은 장년층주부나 남성관객에게 대단한 기쁨을 줬다.
모처럼 남편과 나들이 나온 중년 부인들은 생활속의 스트레스를 풀수
있었다며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민감한 웃음과 재빠른 박수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준 젊은 관객들도 객석
과 무대를 일체화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처럼 황홀한 얼굴을 한 관객으로 가득찬 국내 뮤지컬 공연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같다.
매일 저녁 나는 공연장소인 호암아트홀로 출근했다.
과감한 공개오디션을 거쳐 기용한 신인 여주인공의 각진 얼굴에 맞지 않는
가발을 수없이 고치는 일도, 음향이나 연기자들의 컨디션 점검도 중요했지만
공연장을 빠져 나오는 관객들의 행복한 표정을 대하는 일이 무엇보다 기뻤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든 관객들의 주름진 얼굴위로 번지던 환한 웃음들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제작자 기술스태프 배우들의 각고의 노력은 곧 관객들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지나친 문화사대주의 일류지향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유명
작품을 도입하고 그들의 기술적 도움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들에게 제대로 된 감동을 주는 공연을 열고 싶다는 것.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가 한창이다.
우리집도 둘째아이 입시문제로 부모로서 속물적 번뇌를 겪었다.
대학선택을 놓고 부족한 수능점수로 아이는 크게 낙담했고 아내는 대학
선택을 "사고 싶은 물건을 두고 부족한 주머니사정에 짜증내는 쇼핑"에
비유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겉모양보다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평생
즐겁게 하며 살기를 바란다.
피말리는 제작과정과 무대 뒷얘기를 알 턱 없는 친구들이 "취미를 직업
으로 삼았다"며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니까.
올해도 내 기쁨은 너그러운 우리 관객들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주는 일일
것이다.
내 아이 입시에서와는 반대로, 제대로 된 내실있는 뮤지컬과 연주회를
보다 싼 입장권으로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부단히 고민하고 열심히
준비해 나갈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행복한 미소와 끊임없이 만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8일자).
꼭 보고싶은 공연도 많지만 기획한 사람이나 연출자와의 친분 때문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가서 출석부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그 공연에 대해 나같은 동업관계자들의 반응을 적잖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같고 나 또한 그들 작품의 완성도와 출연자들의 기량을 나름대로
가늠해 보는 기회도 돼 영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공연에서는 1막후 또는 중간 휴식시간에 칭병을 하거나 다른
구차한 이유를 대면서 초대한 분께 양해를 구하고 돌아와 버리기도 한다.
예산부족이나 맞지 않는 수지타산등 어려운 제작환경을 감안하더라도 기획
준비과정에서 전문성이 결여되거나 안목이 부족한 공연의 경우다.
예술적 향기나 감동 아니면 최소한 시청각의 즐거움도 느끼기 힘들때
공연장을 빠져 나오며 나는 계속 객석에 남아 있는 참을성있는 많은 관객을
쳐다본다.
사실 우리 청중들은 고마울 정도로 너그럽다.
이미 낸 비싼 관람료 때문인지 우리 민족 특유의 이해심 덕인지 여하튼
우리 관객들은 아무리 미흡한 공연이라도 끝까지 봐주는 것은 물론
박수에도 인색하지 않다.
바로 이런 고객들의 너그러운 관람태도야 말로 공연장시설등 기본적인
"공연 인프라"의 부족과 능력있는 출연자, 창작인력의 기근 속에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제작관계자들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박수없는 냉담한 객석, 공연중간에
일어나거나 심지어 야유하는 관객을 만나게 될 때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년에 뮤지컬 "42번가"를 공연할 때의 일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와의 최초 제작협력 작품으로 흥행에서도 꽤 성공적이었다.
어쭙잖은 미국문화의 이식이라는 등 일부 비평가의 매서운 질책이 있었고
엄청난 제작비로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던 공연이었다.
통역요원을 포함한 우리 제작진과 배우, 미국의 스태프들은 발목이 삐도록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결과는 곧 개막무대에서의 관객반응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의 "신데렐라"플롯 리듬감 탭댄스의 흥겨움등은 상대적으로 신바람
의 기회가 적은 장년층주부나 남성관객에게 대단한 기쁨을 줬다.
모처럼 남편과 나들이 나온 중년 부인들은 생활속의 스트레스를 풀수
있었다며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민감한 웃음과 재빠른 박수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준 젊은 관객들도 객석
과 무대를 일체화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처럼 황홀한 얼굴을 한 관객으로 가득찬 국내 뮤지컬 공연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같다.
매일 저녁 나는 공연장소인 호암아트홀로 출근했다.
과감한 공개오디션을 거쳐 기용한 신인 여주인공의 각진 얼굴에 맞지 않는
가발을 수없이 고치는 일도, 음향이나 연기자들의 컨디션 점검도 중요했지만
공연장을 빠져 나오는 관객들의 행복한 표정을 대하는 일이 무엇보다 기뻤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든 관객들의 주름진 얼굴위로 번지던 환한 웃음들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제작자 기술스태프 배우들의 각고의 노력은 곧 관객들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지나친 문화사대주의 일류지향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유명
작품을 도입하고 그들의 기술적 도움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들에게 제대로 된 감동을 주는 공연을 열고 싶다는 것.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가 한창이다.
우리집도 둘째아이 입시문제로 부모로서 속물적 번뇌를 겪었다.
대학선택을 놓고 부족한 수능점수로 아이는 크게 낙담했고 아내는 대학
선택을 "사고 싶은 물건을 두고 부족한 주머니사정에 짜증내는 쇼핑"에
비유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겉모양보다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평생
즐겁게 하며 살기를 바란다.
피말리는 제작과정과 무대 뒷얘기를 알 턱 없는 친구들이 "취미를 직업
으로 삼았다"며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니까.
올해도 내 기쁨은 너그러운 우리 관객들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주는 일일
것이다.
내 아이 입시에서와는 반대로, 제대로 된 내실있는 뮤지컬과 연주회를
보다 싼 입장권으로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부단히 고민하고 열심히
준비해 나갈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행복한 미소와 끊임없이 만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