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로 이긴다"

기업부설연구소가 경제전쟁의 최전방을 담당할 전진기지로 각광받고 있다.

선진국의 기술장벽과 저임금을 앞세운 개발도상국의 추격속에서
기업부설연구소들은 "기술입국"의 특명을 받고 있다.

우리만의 특화된 기술로 21세기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느냐의 희망과
의지가 이들 어깨에 달려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작년말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술연구소는 모두 2천6백10개소이다.

여기서 박사 3천6백62명(5.2%), 석사 2만4백42명(30.4%), 학사 4만3천77명
(61.1%) 등 모두 7만5백3명의 연구원들이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만 신설된 기업부설연구소는 모두 4백15개로 한햇동안
설립된 연구소 숫자로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기업들이 각종 비용절감에 나섰지만 연구개발
(R&D)비까지 축소할 수는 없다는 "기술경영마인드"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신설연구소를 연구분야별로 보면 전기.전자분야가 2백28개로 전체의
54.9%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계.금속분야가 83개(20.0%), 화학분야가
50개(12.0%)를 차지해 미래첨단산업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소의 설립은 또 중소기업에서 특히 많았다.

이는 대기업의 경우 80년대에 어느정도 연구소 설립을 완료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소기업들도 국제화 개방화에 따른 무한경쟁시대에는 기술자립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임을 절감하게 됐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저울이란 단일상품으로 세계 60여개국을 개척한 카스, 공작기계제어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터보테크, 반도체 검사장치 제조업체인 미래산업,
가상현실게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가산전자 등 이른바 "잘 나가는 기업"
뒤에는 반드시 "잘 나가는 기술연구소"가 있었다.

이들 기업의 연구소는 대기업 못지않은 연구개발력과 경쟁력을 갖춘
곳으로 꼽힌다.

이들 기업부설연구소는 국내 연구개발투자의 80%가량을 차지하는
기술입국의 견인차들이다.

국내 과학기술연구의 메카라 불리는 과학기술연구원이 설립된 것은
지난 66년.

그러나 민간 차원의 기업연구소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10년 이상 뒤진 70년대말부터다.

지난 78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매출액 3백억원 이상 기업에 연구소
설립을 권장함에 따라 이듬해 2월 민간연구소 설립추진협의회가 만들어졌다.

81년10월 53개 연구소가 처음으로 인증받은데 이어 83년 1백개, 88년
5백개, 91년 1천개, 93년 1천5백개, 95년 2천개를 넘어서는 등 이후 기업
부설연구소는 확장일로를 거듭했다.

이처럼 연구소가 급증한데는 정부의 적극적인 기술개발지원제도와 함께
핵심기술로 개방경제시대를 헤쳐나가려는 기업들의 의지가 상승작용했다.

기업부설연구소가 설립되면 정부는 우선 기술개발비의 일정률을 법인세나
소득세에서 공제해주고 부동산에 대해서는 지방세를 면제해준다.

연구개발용품중 정부가 고시한 품목과 재료의 경우 관세의 80%를 경감시켜
준다.

또 석사 이상 연구원에 대해서는 5년간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병역의무를 면제하는 전문연구요원(병역특례)제도도 실시되고 있다.

특정연구사업에 대해서는 기금을 둬 자금지원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기업부설연구소가 양적으로 늘어나며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개 기업이 하나의 연구소를 보유하는 일반적인 것외에 독립된 일반법인,
그룹 차원의 대규모 종합연구소가 등장했으며 한기업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연구소의 통합과 분화도 새로운 경향이다.

기반기술은 그룹 차원의 종합연구소에서, 생산현장에서 즉시 적용이
가능한 응용기술은 각 사업부 또는 지역별로 특화된 연구소에서 담당하는
분업체제가 이뤄지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해외연구소 설립도 활발해지고 있다.

최신정보의 습득과 현지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적진에 직접 뛰어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연구소 설립지역도 기존의 미국이나 일본 중심에서 벗어나 중국 러시아
유럽 등으로 다변화되고 있다.

해외연구소는 작년말 현재 현지사무소나 해외법인 형태로 약 60여개가
활동하고 있다.

조성락 산기협부회장은 "해외연구소의 설립은 실보다 득이 많다"며
"미국내 6백여개가 넘는 외국기업 연구소중 일본기업이 2백24개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국내기업도 연구소의 해외진출을 더욱 가속화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연구소장의 지위가 사장 부사장 등 최소한 상무급 이상 중역으로
격상돼 기존의 "엔지니어" 차원이 아닌 회사성장 및 경영전략상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기업부설연구소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양에 걸맞는
질적인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선 연구소의 규모면에서 선진국과 크게 차이가 난다.

지난해 설립된 4백15개의 연구소중 연구인력을 10명 이상 확보한 곳은
90개로 21.7%에 불과했다.

30명 이상은 22개(5.3%)로 더욱 작아진다.

연구소의 면적에서도 어지간한 사무실 규모보다 작은 50평 미만이
2백46개소로 전체의 59.3%에 이르렀다.

민간기업이 국가 전체 연구개발투자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인데도
고급연구인력인 박사급 연구원은 전체의 8.7%만이 기업에 종사할 뿐
나머지는 대학 등지로 뺏기는 왜곡된 인력수급구조도 문제가 되고 있다.

연구의 내용도 문제다.

산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기초연구는 거의 없고 응용연구도 내실있는
연구를 하는 곳은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중소기업 연구소에서는 아직도 간판만 연구소일뿐 병역특례 등의 혜택을
받기 위해 한두명의 석사가 품질관리업무를 수행하는 곳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게 공작기계 등 자본재산업이다.

기반기술이 약하다보니 수출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생산기계 등 수입이
더욱 늘어나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도 이제는 경제규모에 걸맞는 핵심기술을 보유할
때"라며 "기업부설연구소도 양적인 숫자채우기보다는 내실있는 질적 도약이
시급한 때"라고 한목소리로 지적하고 있다.

< 이영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