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을 때 비로서
늙게 된다"

미국 시인 사무엘 올맨은 "청춘"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또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젊고 실망이 있으면 늙는다"고도 했다.

올맨이 내린 정의를 따른다면 박용도 전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사장은
올해로 62세이지만 분명 아직도 청춘이다.

청년시절부터 품어온 "킬리만자로 등정"이라는 꿈을 40여년의 세월을 지낸
후 마침내 실현했으니 말이다.

또 앞으로 킬리만자로에서 그치지 않고 6대주의 명산을 모두 정복해
보겠다는 패기에 차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그는 친구의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는 "무직자" 신세임에도 전혀
흐트러진 모습없이 어느 "현직" 못지 않게 자신감에 넘쳐 있다.

상공부(현 통상산업부)차관까지 지낸 전직 경제관료로서, 또 무공사장
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중소기업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준비중이라는
박 전사장을 만나 무공사장 퇴임후의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

[ 만난사람 = 임혁 < 산업1부 기자 > ]

-무공에서 퇴임하신지 거의 1년이 돼셨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책도 읽고 생각도 많이하여 나름대로 바쁘게 보냈습니다.

작년 6월에는 모스크바 대학 명예교수로 위촉돼 러시아와 북구 3국을 둘러
보기도 했고요.

아울러 킬리만자로 등정을 목표로 훈련하고 준비하는데 많은 정성을 쏟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등정준비가 간단치는 않았을텐데요.

<>킬리만자로 정상을 밟아보는게 평생소원이었기 때문에 평소 기본적인
준비는 돼 있었지요.

하지만 현지에서 묵을 산장 등 숙박시설을 예약한다든지 입산허가를 받는
일 등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탄자니아와 수교를 맺은지 얼마 안되는데다 현지에 진출해 있는 우리
기업도 없어서 더 애를 먹은 것 같습니다.

-킬리만자로 등정이 평생소원이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까.

<>제가 대학재학중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행동주의
문학이 대학생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모았어요.

저도 그때 헤밍웨이문학에 심취해 그의 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그중에도 "킬리만자로의 눈"이 가장 인상적이었지요.

그 책을 읽고 나도 한번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소설에는 킬리만자로 정상의 분화구에 검은 표범이 누워 있다고 돼 있어서
그게 사실인지도 꼭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고요.

(웃음)

-산을 타신지는 언제쯤부터인가요.

<>그것도 대학 2학년때부터입니다.

당시는 고학생활을 하느라 무척 고생스러웠어요.

그런데 어느 가을날 우연히 도봉산을 올라갔는데 경관이 그렇게 좋고
고달픈 일상이 싹 잊혀지더라구요.

그때부터 산을 타기 시작해 지난 40여년간 국내 1천미터이상 산은 거의
다 돌았습니다.

해외에서는 78년에 일본 후지산에 올랐고 작년에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에
있는 키나발루산을 다녀왔지요.

-산을 좋아하는 분들은 어울려 다니는 산친구들도 많던데요.

<>상공부 근무할 때는 지금 삼성그룹고문으로 있는 신국환씨 같은 분들
하고 자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혼자 다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물론 등산은 여러 사람이 다니는게 즐겁겠지만 등산경력이 쌓이다 보면
그런 즐거움보다도 산정에 올라서 인생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수련의 도장
으로 바뀌게 되지요.

그래서 저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번에 킬리만자로 가실 때 주위에서 걱정은 않던가요.

<>저도 그럴까봐 등정계획을 일체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해서인지 주변분들이 알게됐고 하나같이들 만류하더군요.

저와 대학동창인 이수성총리 같은 분은 굳이 가려면 만약에 대비해
집사람을 "감시자"로 데리고 가라고 하더군요.

결국 그 충고대로 이번 등정에는 집사람이 동행해 제가 산에 오르는 동안
산밑의 만다라산장에서 대기했지요.

우리 부부가 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집사람
으로서는 그다지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겠지요.

(웃음)

-그렇게 주위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고집하셨는데 등산중에
특별히 위험했던 일은 없었습니까.

<>킬리만자로 등정은 5일동안 계속 올라가야 되는데 정상이 다가올수록
산소가 부족해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저도 마지막날 밤 12시에 출발했는데 정상에서 25분을 남겨 놓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나니 겁을 먹은 가이드는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하더군요.

사실 그때 저도 판단이 어려웠습니다.

워낙 산소가 부족한 고소이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생명은
둘째치고라도 뇌에 손상이 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40년을 별러온 꿈을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로 끝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킬리만자로를 등정했다는 분들이 많던데요.

얼마전에는 어느 할머니도 킬리만자로를 정복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국내에서 킬리만자로 정상에 등정했다고 보도되는 분중에는
"길만스포인트"까지 다녀온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길만스포인트는 킬리만자로 정상이 아니고 진짜 정상은 이번에
제가 다녀온 "우후르피크"예요.

거리는 길만스포인트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상당히 난코스지요.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길만스포인트를 정상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알면서도 길만스포인트까지만 갔다와서는 정상에 올랐다고들 한다더군요.

현지당국에서 길만스포인트까지만 가도 등정 인정서류를 내주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취미중에서 유독 등산을 즐기시는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한마디로 산이 지닌 덕성에 매료됐기 때문이지요.

산이 지닌 덕성은 많지만 그중에도 항상 부동의 자세로 만고불변인 점에
가장 매력을 느낍니다.

청산원부동 백운자거래라는 시구도 있지 않습니까.

산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데 구름이 오락가락하면서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한다는 뜻이지요.

산을 닮아 시속에 영합하지 않고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부동의
자세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산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화합합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자세가 필요하지요.

-킬리만자로 외에 앞으로 또 해외등정계획은 없습니까.

<>시간이 허용되면 6대주의 대표적인 산을 다 올라보고 싶습니다.

호주의 마운트 쿡, 러시아 코카서스산맥의 엘브르즈, 칠레의 아콩카쿠아,
네팔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봉우리들이지요.

안나푸르나는 너무 높아 솔직히 제나이에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무리
이겠지만 트레킹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등산 얘기는 이쯤하고 화제를 바꿔 보지요.

무공사장으로 계실 때 대북한 쌀지원 문제에 깊숙이 간여하셨는데 지금
공개할만한 비화는 없습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알려도 될 사항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고 봅니다.

물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항도 있지만 그런 사항들은 공직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무덤까지 가슴에 담아두어야 겠지요.

항간에 북한에 쌀을 지원한데 대해 이런 저런 시비가 많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지만 지금도 당시 정부의 정책과 코트라 역할에 대해서는 옳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북의 사정에 의해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해 아쉬울 뿐이지요.

제 경험으로도 북한당국은 참 종잡을 수 없는 집단입니다.

-요즘 수출이 안된다고 해서 걱정들이 많은데요.

공직을 떠나시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 경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

<>무역적자가 2백억달러를 넘어선 사실은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무역수지는 산업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바로미터 아닙니까.

한마디로 우리 산업경쟁력에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를 보면 금리 지가 임금 물류비 어느 하나도 경쟁국에
비해 나은 구석이 없어요.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기업은 기술개발과 생산성향상에 힘써야 하고
근로자들은 산업평화에 협조해야 합니다.

또 일반국민들은 소비를 자제하고 저축에 힘써야 겠지요.

사실 이런 얘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문제는 실천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 대학동기중에 아직도 공직에서 활동중인 분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분들도
모두가 제 밥그릇만 찾으려고 하는 풍토가 제일 문제라고 개탄하더군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