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미스김. 지영웅씨 면담은 언제라도 예약해줘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많이 회복되고 있는 중이니까. 알았지, 미스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차고 다라진 미스김의 똑 떨어지는 대답소리와 함께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부인환자가 그 보호자 같은 남자와 면담실로 들어선다.

쉴 시간도 없이 간호사가 들여보낸 것을 보면 아마도 급한것 같다.

"그리 앉으시죠"

공박사는 차트를 들여다 본다.

이름은 박춘희, 55세, 압구정동 <><>아파트면 바로 요 앞동이다.

"어떻게 오셨지요?"

공박사는 넋나간 듯이 앉아 있는 박춘희를 보지 않고 그 뒤에 앉아 있는
남편인 듯한 잘 생긴 남자에게 시선을 준다.

그 남자는 몹시 창피하다는 듯이 박춘희를 보면서, "이봐, 박사님에게
무엇이라고 말을 좀 해요"

그래도 그 부인은 멍청하니 넋나간 사람처럼 반응이 없다.

"박춘희 여사님, 무슨 말을 하셔야 제가 면담을 해드리지요"

참으로 딱한 여자다.

실어증에 걸린 걸까? 공박사는 상당한 미모의 박춘희에게서 탤런트
김혜자의 얼굴을 언뜻 떠올린다.

왜 그런 연상을 했을까? 그 여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박춘희라는
여자인데. 이상한 연상작용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인상이 탤런트와 비슷할 때에 그런 착각을 할 수가 가끔 있다.

"저, 이 사람은 술을 과하게 마셔요"

아,그랬구나.

알콜 중독자로구나.

그때야 공박사는 남편과 이야기를 하는 편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환자는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술을 많이 마신지 얼마나 오래
되었지요?"

공박사는 무심하게 말한다.

그 순간 박춘희가 발작하듯 껄껄 웃으며, "나는 정신병원에 올 이유가
없어요. 선생님, 나는 돌아가겠어요"

발악하듯 그 여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면담실 도어쪽으로 내닫는다.

"이봐, 병원에 순순히 따라 나선 것은 당신이 아니야? 이거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 일요일 내내 말을 안 하고 있었어요.

박사님, 술을 몰래 마시고 또 마시고 그래요.

제발 술을 안 마시게 해야 돼요.

요새 알콜 클리닉이 있다지요? 나는 에편네가 술마시고 히히거리거나
실실 웃으면서 말 안 하고 남편 괴롭히는것, 이건 못 참아요"

옷매무새는 상당히 말쑥하고 멋쟁인데, 60줄도 안 된 신사가 "에편네"
어쩌고 하는것 보니 상당히 무식하거나 아주 보수적인 사람인것 같다.

영동, 특히 압구정동에는 말죽거리 원주민들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다가 벼락부자가 되어 현대아파트에 많이 몰려 살고 있는데, 그들은
옷매무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많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