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열전] (5) 절재 김종서 <5>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그러자 드디어 8월 30일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변방의 수령으로 병을
핑계하고 임금을 속여 사직한 죄와 임금과 장수를 이간한 죄, 임금이 하지
않은 말을 꾸며서 외방에 전파한 죄는 참수에 해당하는 죄이니 마땅히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참수형의 집행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간계로 자신을 농락한 상대를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성군으로서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종서는 박호문의 참소로 이렇게 큰 곤경을 겪었지만 세종의 총애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김육(1580~1658)이 지은 "해동명신록" 권3 김종서조에 의하면 세종은
김종서의 북변 개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비록 과인이 있다 하더라도 종서가 없었다면 족히 이 일을 이루어 내지
못했을 것이고, 비록 종서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과인이 없었다면 이 일을
주간하고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의 이런 신임과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 이해 10월에 일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저들을 제압하여 옛땅에 돌아와 살게 하려는 의도로부터 나온 전략이었다.
왕명을 받들지 않은 일로 물의가 있었으나 세종의 특명으로 이는 불문에
부치게 된다.
김종서나 세종이 모두 미안한 마음의 표시를 이렇게 하였던 듯 하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더 이상 변방에 머물게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
하였던지 12월 3일 인사발령에서 김종서를 형조판서로 임명하여 내직으로
불러 올린다.
김종서의 나이 58세이고 세종은 44세이다.
이때 후임 함길도 도절제사로는 이미 지난해 6월 23일자에 도관찰사로
발령받아 나가서 김종서로부터 북변의 방수 요령을 전수받고 있던 이세형이
임명된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가 떠난 북변이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던 듯 바로
다음날인 12월 4일에 김종서에게 신구교체 이후에도 북방의 책임은 모두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신임 도절제사에게 방어 전략을 일일이 전수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전지를 내린다.
어떻든 김종서는 이 해를 넘기지 않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의 직임을 맞게
되는 듯 세종23년(1441) 1월 18일 정사에는 형조판서의 자격으로 입시하여
오도리족의 방어대책을 의논한다.
세종은 비록 김종서를 서울로 불러 올렸지만 북변의 일은 끝까지 그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였던지 형조판서로 정사에 처음 참여한 그 다음날인
1월 19일에 병조에 전지하여 지금 이후로 함길도의 사변및 방어하는 등의
일은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함께 의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법률에 능통하였던 그에게 법률 정비의 책임을 맡기기 위해 사율원
제조의 책임을 겸직하게 하였으니 형조판서의 자리를 맡긴 것도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임을 완수하자 세종은 이해 11월 14일에 김종서를 예조판서 자리로
옮긴다.
이해 7월 23일에 왕세자빈인 안동권씨가 원손을 탄생시키고 그 다음날인
7월 24일에 산후통으로 돌아가니 9월 21일 현덕빈(1418~41) 안동권씨의
장례를 치른 다음 세종은 28세밖에 안된 왕세자(1414~52)를 재혼시키기
위해 9월 25일 왕세자 가례색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왕세자빈의 후보를
물색하게 된다.
그래서 10월 19일에는 왕비와 함께 사정전에 나가 후보로 뽑혀온 30명의
처녀중에서 일차 간선을 친행한다.
세자의 혼례는 국가의 대례이니 이를 담당할 예조의 장관은 가장 신임할
만한 인물이 아니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옮겨놓은 다음 12월 7일에 다시 사정전에서
왕비와 함께 재간택을 친행하여 판서운관사 문민의 따님과 예빈직장 권격의
따님을 뽑는다.
세종은 권격의 따님이 마음에 들었던 듯 한데 그 맏따님이 이미 세종의 제
4서왕자인 한남군 어에게 출가해 와 있었으므로 이제 그 막내 따님으로
동궁빈을 삼게 되면 형제가 동서 사이가 되니 그것이 예법에 맞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북위때 최호 형제가 곽일의 두 딸을 각기 아내로 삼았던
고사를 이끌어, 그 타당성을 가례색 제조인 김종서 등에게 타진해본다.
김종서는 남지와 함께 최호는 성현이 아니니 그를 본받을 수 없다고 단호
하게 잘라 말한다.
그래서 그랬던지 끝내 왕세자 가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간택까지 치르고 나서 가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예가 아니므로
귀족사회로부터 엄청난 저항이 있었을 터인데 소리없이 이를 무마하여
표면화시키지 않은 것을 보면 김종서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세종대왕은 그렇게 그를 믿고 항상 큰 일을
맡기었었던가 보다.
세종은 이 일 말고도 김종서에게 예조판서를 맡겨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제 45세의 장년기로 접어들면서 학문도 심오해지고 세상 경륜도 쌓이게
되자 세종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점점 깊어져갔던 것이다.
그래서 태종이래 실시해온 가혹한 억불정책을 서서히 완화해 가고자
하는데 이 일이 예조에 속한 일이므로 김종서를 그 자리에 앉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헤아려 처리해가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온천욕으로 겨우 지탱하는 자신과 왕비의 건강과, 앞서간
세자빈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조 원찰인 흥천사 사리각을 보수하고 거기서
경찬법회를 베풀려고 한다.
드디어 11월 25일에 도진무 성달생(1376~1444)을 불러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에 쓸 물품을 의논하게 되니 윤 11월 7일 사헌부 장령 홍심이 이의
정지를 계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집현전 성균관등에서 혹은
합계하기도 하고 혹은 단독으로 상소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이의 중지를
청한다.
불교 숭신의 실마리를 열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종서는 이런 물의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 11월 15일 육조의 의견을 종합하여 병조판서 신인손(1384~1445)
과 함께 사리각을 고쳐 세우는 것은 좋으나 경찬법회만은 중지시키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자신들이 세종을 가까이 모셔 오면서 즉위이래 일정일사도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었는데 이번 일만은 교화에 허물이 되니 직분상 충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간략한 불사는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며 이런 의견을
일축해 버린다.
그 다음날인 윤 11월 16일에도 김종서와 신인손은 백성들이 불사를 베푸는
것은 법으로 금하면서 임금이 먼저 법을 무너뜨리면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다며 다시 한번 경찬법회의 중지를 간하지만 세종은 듣지 않고 이를
감행할 뜻을 보인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다음해인 세종24년(1442) 1월 5일에 불교 승단 생활의
기본이 되는 안거(여름 4개월과 겨울 4개월 동안 절에 앉아 수행정진하는
것, 하안거 동안거라고 각각 부른다)를 금지시키자는 극단적인 요청까지
하지만 세종이 이를 들어줄 리가 없다.
한편 세종은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늘 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리각 경찬법회 문제로 유신들이 계속 시끄럽게 하자
귀찮아서 2월 24일에 안질이 날로 심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왕세자로
하여금 이를 돌보게 하겠다는 뜻을 대신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3월 1일에 용비어천가 찬집을 명하고 3월 3일에는 왕비와 함께
강원도 이천 온정으로 휴양을 떠난다.
김종서도 여러 대신 중신들과 함께 어가를 수행하여 이천으로 가는데,
세종은 여기서 3월 17일에 직제학 이선제로 하여금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
소문을 지어 바치게 하고 성달생을 행향사로 하여 환관 최혼과 함께 흥천사
로 올려 보낸다.
3월 24일에 개최되어 5일동안 이어지는 경찬법회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흥천사 경찬법회가 무사히 끝나자 4월 2일 김종서는 황보인과 함께 이천의
지세가 산이 높고 물살이 세차서 장마를 만나면 수재가 염려되니 장마철이
되기 전에 상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뢴다.
세종은 이 말을 가납하여 4월 16일에 어가를 돌려 상경길에 오르는데 5월
1일에는 왕비와 함께 경복궁으로 환어한다.
그리고 유신들이 다시 시끄럽게 할까보아 5월 3일에는 안질을 핑계로
왕세자에게 서무를 대신 결재하라고 한다.
그런데 7월 29일에 김종서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를 맡아 나가 있던
이세형이 임지에서 갑자기 죽는다.
이에 부랴부랴 김종서는 일찍이 함길도 조전첨절제사를 지낸 적이 있는
김효성(?~1454)을 천거하여 8월 3일 함길도 도절제사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다음해인 세종25년(1443) 1월 7일에는 평안도 도절제사로 내려가
있는 이징옥의 아들 둘에게 벼슬을 내려달라는 청을 세종께 드린다.
외직에서 오래 수고한 공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토록 김종서는 자기 사람을 아끼고 키워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47세가 된 세종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수릉(생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자리를 찾게 하니 김종서는 진양대군(뒷날
수양대군) 유(1417~68)와 안평대군 용(1418~53)등과 함께 태종 헌릉이 있는
대모산으로 가서 헌릉의 서쪽 언덕을 찾아내어 수릉자리로 정한다.
김종서는 이 해에 회갑을 맞는 61세의 노인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1일자).
핑계하고 임금을 속여 사직한 죄와 임금과 장수를 이간한 죄, 임금이 하지
않은 말을 꾸며서 외방에 전파한 죄는 참수에 해당하는 죄이니 마땅히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종은 끝내 참수형의 집행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간계로 자신을 농락한 상대를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성군으로서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종서는 박호문의 참소로 이렇게 큰 곤경을 겪었지만 세종의 총애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김육(1580~1658)이 지은 "해동명신록" 권3 김종서조에 의하면 세종은
김종서의 북변 개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비록 과인이 있다 하더라도 종서가 없었다면 족히 이 일을 이루어 내지
못했을 것이고, 비록 종서가 있다 하더라도 만약 과인이 없었다면 이 일을
주간하고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의 이런 신임과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 이해 10월에 일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의 땅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저들을 제압하여 옛땅에 돌아와 살게 하려는 의도로부터 나온 전략이었다.
왕명을 받들지 않은 일로 물의가 있었으나 세종의 특명으로 이는 불문에
부치게 된다.
김종서나 세종이 모두 미안한 마음의 표시를 이렇게 하였던 듯 하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더 이상 변방에 머물게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
하였던지 12월 3일 인사발령에서 김종서를 형조판서로 임명하여 내직으로
불러 올린다.
김종서의 나이 58세이고 세종은 44세이다.
이때 후임 함길도 도절제사로는 이미 지난해 6월 23일자에 도관찰사로
발령받아 나가서 김종서로부터 북변의 방수 요령을 전수받고 있던 이세형이
임명된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가 떠난 북변이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던 듯 바로
다음날인 12월 4일에 김종서에게 신구교체 이후에도 북방의 책임은 모두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신임 도절제사에게 방어 전략을 일일이 전수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전지를 내린다.
어떻든 김종서는 이 해를 넘기지 않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의 직임을 맞게
되는 듯 세종23년(1441) 1월 18일 정사에는 형조판서의 자격으로 입시하여
오도리족의 방어대책을 의논한다.
세종은 비록 김종서를 서울로 불러 올렸지만 북변의 일은 끝까지 그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였던지 형조판서로 정사에 처음 참여한 그 다음날인
1월 19일에 병조에 전지하여 지금 이후로 함길도의 사변및 방어하는 등의
일은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함께 의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법률에 능통하였던 그에게 법률 정비의 책임을 맡기기 위해 사율원
제조의 책임을 겸직하게 하였으니 형조판서의 자리를 맡긴 것도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임을 완수하자 세종은 이해 11월 14일에 김종서를 예조판서 자리로
옮긴다.
이해 7월 23일에 왕세자빈인 안동권씨가 원손을 탄생시키고 그 다음날인
7월 24일에 산후통으로 돌아가니 9월 21일 현덕빈(1418~41) 안동권씨의
장례를 치른 다음 세종은 28세밖에 안된 왕세자(1414~52)를 재혼시키기
위해 9월 25일 왕세자 가례색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 왕세자빈의 후보를
물색하게 된다.
그래서 10월 19일에는 왕비와 함께 사정전에 나가 후보로 뽑혀온 30명의
처녀중에서 일차 간선을 친행한다.
세자의 혼례는 국가의 대례이니 이를 담당할 예조의 장관은 가장 신임할
만한 인물이 아니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옮겨놓은 다음 12월 7일에 다시 사정전에서
왕비와 함께 재간택을 친행하여 판서운관사 문민의 따님과 예빈직장 권격의
따님을 뽑는다.
세종은 권격의 따님이 마음에 들었던 듯 한데 그 맏따님이 이미 세종의 제
4서왕자인 한남군 어에게 출가해 와 있었으므로 이제 그 막내 따님으로
동궁빈을 삼게 되면 형제가 동서 사이가 되니 그것이 예법에 맞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북위때 최호 형제가 곽일의 두 딸을 각기 아내로 삼았던
고사를 이끌어, 그 타당성을 가례색 제조인 김종서 등에게 타진해본다.
김종서는 남지와 함께 최호는 성현이 아니니 그를 본받을 수 없다고 단호
하게 잘라 말한다.
그래서 그랬던지 끝내 왕세자 가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재간택까지 치르고 나서 가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예가 아니므로
귀족사회로부터 엄청난 저항이 있었을 터인데 소리없이 이를 무마하여
표면화시키지 않은 것을 보면 김종서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세종대왕은 그렇게 그를 믿고 항상 큰 일을
맡기었었던가 보다.
세종은 이 일 말고도 김종서에게 예조판서를 맡겨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제 45세의 장년기로 접어들면서 학문도 심오해지고 세상 경륜도 쌓이게
되자 세종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점점 깊어져갔던 것이다.
그래서 태종이래 실시해온 가혹한 억불정책을 서서히 완화해 가고자
하는데 이 일이 예조에 속한 일이므로 김종서를 그 자리에 앉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헤아려 처리해가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온천욕으로 겨우 지탱하는 자신과 왕비의 건강과, 앞서간
세자빈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조 원찰인 흥천사 사리각을 보수하고 거기서
경찬법회를 베풀려고 한다.
드디어 11월 25일에 도진무 성달생(1376~1444)을 불러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에 쓸 물품을 의논하게 되니 윤 11월 7일 사헌부 장령 홍심이 이의
정지를 계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집현전 성균관등에서 혹은
합계하기도 하고 혹은 단독으로 상소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이의 중지를
청한다.
불교 숭신의 실마리를 열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김종서는 이런 물의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 11월 15일 육조의 의견을 종합하여 병조판서 신인손(1384~1445)
과 함께 사리각을 고쳐 세우는 것은 좋으나 경찬법회만은 중지시키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자신들이 세종을 가까이 모셔 오면서 즉위이래 일정일사도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었는데 이번 일만은 교화에 허물이 되니 직분상 충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간략한 불사는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며 이런 의견을
일축해 버린다.
그 다음날인 윤 11월 16일에도 김종서와 신인손은 백성들이 불사를 베푸는
것은 법으로 금하면서 임금이 먼저 법을 무너뜨리면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다며 다시 한번 경찬법회의 중지를 간하지만 세종은 듣지 않고 이를
감행할 뜻을 보인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다음해인 세종24년(1442) 1월 5일에 불교 승단 생활의
기본이 되는 안거(여름 4개월과 겨울 4개월 동안 절에 앉아 수행정진하는
것, 하안거 동안거라고 각각 부른다)를 금지시키자는 극단적인 요청까지
하지만 세종이 이를 들어줄 리가 없다.
한편 세종은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늘 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리각 경찬법회 문제로 유신들이 계속 시끄럽게 하자
귀찮아서 2월 24일에 안질이 날로 심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왕세자로
하여금 이를 돌보게 하겠다는 뜻을 대신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3월 1일에 용비어천가 찬집을 명하고 3월 3일에는 왕비와 함께
강원도 이천 온정으로 휴양을 떠난다.
김종서도 여러 대신 중신들과 함께 어가를 수행하여 이천으로 가는데,
세종은 여기서 3월 17일에 직제학 이선제로 하여금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
소문을 지어 바치게 하고 성달생을 행향사로 하여 환관 최혼과 함께 흥천사
로 올려 보낸다.
3월 24일에 개최되어 5일동안 이어지는 경찬법회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흥천사 경찬법회가 무사히 끝나자 4월 2일 김종서는 황보인과 함께 이천의
지세가 산이 높고 물살이 세차서 장마를 만나면 수재가 염려되니 장마철이
되기 전에 상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뢴다.
세종은 이 말을 가납하여 4월 16일에 어가를 돌려 상경길에 오르는데 5월
1일에는 왕비와 함께 경복궁으로 환어한다.
그리고 유신들이 다시 시끄럽게 할까보아 5월 3일에는 안질을 핑계로
왕세자에게 서무를 대신 결재하라고 한다.
그런데 7월 29일에 김종서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를 맡아 나가 있던
이세형이 임지에서 갑자기 죽는다.
이에 부랴부랴 김종서는 일찍이 함길도 조전첨절제사를 지낸 적이 있는
김효성(?~1454)을 천거하여 8월 3일 함길도 도절제사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다음해인 세종25년(1443) 1월 7일에는 평안도 도절제사로 내려가
있는 이징옥의 아들 둘에게 벼슬을 내려달라는 청을 세종께 드린다.
외직에서 오래 수고한 공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토록 김종서는 자기 사람을 아끼고 키워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47세가 된 세종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수릉(생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자리를 찾게 하니 김종서는 진양대군(뒷날
수양대군) 유(1417~68)와 안평대군 용(1418~53)등과 함께 태종 헌릉이 있는
대모산으로 가서 헌릉의 서쪽 언덕을 찾아내어 수릉자리로 정한다.
김종서는 이 해에 회갑을 맞는 61세의 노인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