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한국화가 이왈종씨(52)가 12~21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가나화랑
(734-4093)에서 7년동안의 제주 생활을 정리하는 대작전을 마련한다.

지난 90년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제주에 정착, 전업 작가로서 탄탄한
기량을 쌓으며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워온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중도의 세계" 연작 20여점을 선보인다.

출품작들은 2백~3백호짜리 12점을 포함, 대부분 1백호가 넘는 대작들.

실경산수에서 출발해 80년대 중반이후 인간의 내면 세계를 에로틱하게
표출한 "생활속에서"를 발표해오다 제주 생활을 계기로 부조와 종이조각
작업을 해온 이씨가 다시 평면회화로 회귀한 최근의 모습을 보여주는
근작들이다.

한층 중후하고 스케일이 커져 한폭의 장대한 벽화를 연상케 하는
출품작들은 두꺼운 장지를 긁어내리고 파낸 뒤 상감형식으로 색깔을 입힌
음각마티에르 기법의 작품들.

이씨는 두꺼운 한지를 여러겹 겹쳐 압축한 뒤 갖가지 형상들을 새겨넣는
고된 작업을 택한 것은 "욕심과 잡념이 없는 중도의 세계를 제작과정에서
부터 시현하기 위한 행위"라고 밝혔다.

그가 "중도의 세계"에 천착해온 것은 젊은시절 한때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달으며 고민했던 자신의 체험이 계기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 변하면 증오가 되듯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개념들도 따지고 보면 변질되기 이전에는 하나였던 만큼 모든 갈등구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수 있음을 깨닫게 돼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중도의 세계를 즐겨 다루게 됐다고 설명했다.

중도의 개념을 깨달으면 모든 사물을 더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돼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물체가 평등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

따라서 그의 그림속에는 물고기와 새 사슴 꽃 말 하루방 사람 나무 등이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자유롭게 등장하고 있다.

한편 이번 전시회에서는 "색즉시공"을 주제로 인간의 성생활과 깊이
관련된 또다른 중도의 세계를 보여주는 별도의 코너를 마련,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늘의 성생활을 누군가는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시도한
별도의 코너에는 10~12폭의 자그마한 화첩들에 기기묘묘한 행위들이
음각돼있다.

쾌락추구 풍조와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한다는 뜻에서 그린
일종의 "중도화"들이지만 미성년자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다.

< 백창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