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4일 한보 특혜대출의혹 사건에 연루된 전현직 은행장 3명을 동시에
불러 들인 것은 이번 사건의 종착역인 정-관계 인사 소환을 알리는 신호탄
으로 풀이된다.

문제를 읽는 단계에서 벗어나 서서히 정답을 답안지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이형구 전산업은행총재등 이날
소환된 3명의 금융계 거물들이 이번 사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한보와
정관계 커넥션의 연결고리다.

무리수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보에 그처럼 엄청난 돈을 쏟아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이들이다.

따라서 "자신이 서야만 사람을 부른다"는 검찰의 속성으로 볼 때 이들에
대한 소환은 이번 사건의 윤곽이 수면위로 급부상하고 있음을 뜻한다.

검찰이 은행장들에게 조사할 사항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이들이 대출 사례비조로 정총회장에게서 거액의 커미션을
받았는지를 확인하는 것.

물론 이 부분은 사법처리를 의미해 이들에게는 치명적일수 있으나 검찰의
무게중심은 다른데 있다.

어떤 실력자들이 전화를 통해, 또는 은밀한 자리에서 "한보를 잘봐 달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해 왔는지를 자백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검찰이 맨손으로 은행장들을 상대한다고 볼수도 없다.

지난 3일부터 말문을 틔기 시작했다는 정총회장등으로부터 확보한 "명단"을
확인하면서 지금까지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던 제3의 인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렇게 볼때 검찰의 향후 행선지는 꽤 분명해 보인다.

구속대상자인 이들 3명 외에 박기진 전제일은행장등 나머지 전현직 행장
4명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금주까지 마무리 한 뒤 설직후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 것이란 전망이다.

우선 재정경제원(구 재무부).통상산업부(구 상공부).건설교통부(구 건설부)
와 은행감독원등 경제관련 부처의 고위 공무원들이 첫번째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경원과 은감원은 대출 업무관련, 통산부는 당진제철소와 코렉스 방식
인허가, 건교부는 제철소 건설터인 아산만 부지 매립등에 줄줄이 엮여 있는
상태다.

게다가 공직자는 액수나 대가성 여부에 관계없이 돈을 받으면 무조건
처벌할 수 있는 만큼 수사의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우선
사법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치인. 검찰은 정총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들의 일부
명단을 확보했으나 이들을 형사처벌하는데 필수적인 "직무관련성" 또는
"대가성"을 입증하는데는 고심하는 눈치다.

이 대목에서 검찰은 정총회장의 돈을 받은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법을
적용하기 위해 대검 공안부와의 협조아래 법률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국 중수부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수사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해 "높은
산을 오르면 고될 것이고 낮은 산을 오르면 쉽다고 느끼지 않겠느냐"며
흡사 선문답같은 답변을 했다.

그러나 검찰의 이 사건 착수이후 행보로 볼 때 높은 산의 7부능선은
넘어선 것 같다.

< 윤성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