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총수들의 비자금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작년초.

모그룹이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과 관계됐다는 기사가 오후 늦게 터져
나왔다.

홍보실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수뇌부에도 이 사실이 즉각 보고됐다.

이 그룹의 홍보실장은 L이사.

전직 신문기자 출신이다.

홍보실장은 이경우 재빨리 판단해야 한다.

"강공법이냐 무대응이냐".

향후 보도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지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어물쩍 대응했다간 자칫 돌이키기 힘든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

L이사는 고민끝에 "무대응이 상책"이란 결론을 내렸다.

기사에 인용된 근거가 불확실해 섣부른 대응은 공연히 사건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데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TV의 심야뉴스가 끝나고 다음날 조간신문에서 관련기사가 빠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홍보맨.

흔히 그룹을 대변하는 "입"으로 불린다.

그룹과 관련된 중요 관심사항을 언론에 알리고 여론의 향방을 탐지하는게
그들의 주요업무다.

하지만 정치.경제적인 격변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홍보맨들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위상과 기능을 가졌다.

최근 2~3년간 기업인사의 큰 흐름중 하나는 홍보실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홍보담당 임원의 역할도 막중해지고 지위도 사장급으로까지 격상됐다.

신입사원들의 선호부서도 "기획" "관리" 등에서 요즘은 홍보실로 바뀌었다.

대형 사건사고가 많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홍보실이 기업경영에
중요한 전략부서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증거다.

영업과 판매가 정규군끼리의 싸움이라면 홍보전은 여론(언론)과 벌이는
유격전으로 비유된다.

홍보의 영문약자인 PR의 머릿글자를 따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고 자위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현대 경영에선 단순히 제품을 하나 더 파는게 문제가 아니다.

누가 기업이미지라는 초대형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여론의 흐름을
장악하느냐가 경쟁의 관건이 되며 홍보조직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삼성과 현대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PCS사업을 따냈던 LG그룹, 시장경쟁
논리를 앞세워 숙원이던 자동차사업에 진출한 삼성그룹, 국내에 할인점
돌풍을 불러왔던 신세계백화점 등이 벌인 PR활동은 "나라의 이데올로기까지
바꾼다"는 현대 홍보전의 정수로 평가된다.

기업이 어려울수록 홍보실이 발휘하는 위기관리능력은 더욱 빛난다.

대형 사건사고가 터질때마다 사고의 진상을 정확히 알리고 대응책까지
제시함으로써 여론의 공정한 판단을 이끌어내는게 홍보실의 역할이다.

제주공항에서 비행기가 착륙사고를 냈을 때 신속히 사고의 원인과 함께
국내 항공운항의 근원적인 문제점 등을 언론에 제공함으로써 기업이미지를
보호하고 새로운 정책대안까지 이끌어낸 대한항공의 홍보활동은 모범적인
위기관리사례로 꼽힌다.

홍보실의 업무는 최근들어 PC통신이나 인터넷 등 새로운 매체를 통한
여론관리, 그룹총수의 이미지관리(PI) 등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사내 임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도 홍보실의 몫이다.

기아중공업 손춘식부장은 홍보의 위력을 아들의 어깨에서 발견했다고
털어놓는다.

"최근 회사명을 바꾸며 적극적인 홍보활동으로 언론에 회사가 자주
소개됐다.

그러자 아들의 어깨가 펴졌다.

아버지가 유명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홍보맨의 하루는 신문을 보는 것에서 신문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근하자마자 신문을 펴들고 밤사이의 소식을 점검하는게 홍보맨의
첫일이다.

기자들의 전화를 받고 요청받은 자료를 만들다보면 어느새 8시.

다음날자 가판신문이 배달되는 시간이다.

1면부터 맨뒷장까지 샅샅이 훑고난 뒤에야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대개는 기자들과의 술자리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불리한 기사"라도 나오면 아예 퇴근은 생각도 못한다.

동료들이 모두 귀가하고 난 후에도 홍보맨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이영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