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사태가 터진 후 더욱 두드러진 사회풍조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불신의 만연이다.

나나 내 가족 아니면, 더욱이나 공직자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풍토야말로 사회성립의 근본을 흔드는 총체적 불신으로 모자람이 없다.

나아가 불신풍조에는 자소와 무력감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이를 효과적으로
최단시일 안에 해소하지 못한다면 이 땅의 정치발전 경제회복은 커녕
사회건전화를 바라기 힘들게 사태는 내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사태의 전례없는 특징은 한보특혜에 관한 한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게끔 나라 전체를 천박하고 왜소하게 몰고가고 있는 점이다.

처음 며칠 각당 대표들은 거품을 물고 이쪽은 아무 잘못 없고 저편만
비리 덩어리란 식으로 완강한 태도를 보였었다.

하지만 주변이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슬며시 꽁무니를 빼는 느낌을
확산시켜 가고 있다.

결정판은 95년6월에 있었던 당진 한보제철소 1단계준공식 대통령 참석
건의를 둘러싼 당로자간의 불협화다.

대통령 참석을 수차 건의한 것은 당시 주무장관이었다는 문제 제기에
당사자의 부인, 경제수석이었다는 반론이 장-차관급 현-전직의 입에서
꼴사납게 몇차례 오갔다.

쟁점이 어떤 사안에 대한 견해표명이라면 맞설수 있다.

그러나 불과 1년여전에 문서건 구두로건 그런 건의를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순전한 사실문제일 진대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이런
승강이란 국민을 얕보는 농간으로 밖에 볼수 없다.

여기 겹친 것이 9일자로 보도된 대통령 발언 내용이다.

"당시 장관이 몇 차례나 참석을 건의했으나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준공식에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지난 5일 청와대 오찬시 언급이 늦게 전문됐다는 설명이다.

정확하다면 발언 앞부분으로 당시 통산장관의 부인 해명은 거짓이란
혐의가 짙다.

더구나 "불참이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는 뒷부분은 얽히고 설킨
한보문제의 비단순성을 오히려 높인다.

다시 말해 뭐라 해도 국민신뢰의 최후보루는 대통령일진대 그의
한보사건 언명에 추호라도 수동성 내지 불철저성이 비친다면 이는
국민의 공직자에 대한 불신감을 덜기 보다 더해줄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 땅에 정치불신, 나이가 총체적 부패가 총체적 불신으로 까지
상승하는 근본원인을 구명하기란 그리 단순치 않다.

그러나 쉽게 사람의 말, 특히 공직자의 말이 그대로 지켜지는 데서
신뢰가 축적된다는 점에 아무 이견이 없다.

갈수록 중요위치에 있는 공무원이나 공직자들의 공언들이, 특히
득표 정치자금 떡값에 팔려 점점 쉽게 팽개쳐지는 현실을 들여다
볼때 신뢰가 없는 문화권 한국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F 후쿠야마의
지적이 정곡을 찌르지 않나 두렵다.

정치인 정당 국회 정부가 정직을 바탕으로 신뢰풍토 조성에 당장
앞장서라.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