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다정한만큼 괴로움도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근심도
없겠지요. 하늘이 제게 삶을 지켜나가지 못하게 하는군요"

중국 문화혁명 이후 뛰어난 현실비판으로 시단을 흔들었던 천재시인
꾸청.

그가 93년 뉴질랜드의 외딴 섬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목매 자살하기 직전
쓴 유서의 일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자전소설 "잉얼" (전 2권 실천문학사 간)이 국내에서
출간돼 화제다.

꾸청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자유의 물결이 밀려들던 80년대에 탁월한
은유와 시어로 현실을 풍자했던 이른바 "몽롱시"군단의 대표주자.

소설에는 억압과 자유,소외와 개방의 시기를 관통해온 그의 삶이
두 여인 사이의 기이한 사랑과 함께 그려져 있다.

아내의 이름만 다를뿐 등장인물 모두 실명으로 돼있다.

88년 뉴질랜드에 초빙교수로 갔던 그가 강단을 떠난뒤 와이키히섬에서
아내와 아들, 연인 잉얼과 같이 살았던 얘기.

마음의 결을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는 문체와 몽상적 이미지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잉얼은 꾸청 부부와 가까운 소녀.

중국을 떠나 외딴 섬에 정착한 꾸청과 아내 레이는 그토록 꿈꿔왔던
전원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레이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웃들을 만나고 장터에도
나가는 등 사회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이들 사이엔 틈이 생긴다.

결국 꾸청은 편지를 주고받던 잉얼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받고 자신의
희망을 그녀에게 건다.

레이의 주선으로 잉얼이 섬에 도착한다.

몇년만에 만나는 꾸청과 잉얼은 예전같지가 않다.

꾸청에게 잉얼은 더이상 맑고 깨끗한 소녀가 아니며, 잉얼은 그 옛날
대학강단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꾸청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애정과 혼돈속에서 세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두여자는 이상하리만치 다정스럽다.

이런 모습은 소년시절부터 여성에 대해 숭배감을 가져왔던 꾸청을
감동시킨다.

남성은 혐오스런 존재이며 여성은 세상에서 때묻지 않은 꽃봉오리라고
여겨왔던 것.

위태로운 사랑이 계속되는 사이에 영주권을 얻은 잉얼이 늙은 남자를
따라 떠나버리자 극도의 상실감과 허무에 젖은 꾸청은 자살을 결심한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