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서열 24위 총리급 실력자인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의
한국망명신청 사건은 한보사태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우리 정치 경제에 또
하나의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북한 최고실력자 한사람의 한국망명을 기뻐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자세한 망명동기는 구체적으로 밝혀지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최근
경제난으로 허덕이고 있는 북한체제가 사상적으로도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황장엽의 망명요청은 그동안 어려운 경제난 속에서도 북한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주체사상이 와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북한체제의 조기붕괴 신호로 파악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황비서는 북한의 사상적 지주이자 정치 경제적 토대인 주체
사상을 사실상 정립한 인물이라는 상징성과 북한 정권수립 이후 계속 권력
중심부에 서 있어온 거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정부가 공개한 망명동기 석명서에서 황비서는 "노동자 농민이 굶주리고
있는데 노동자 농민을 위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고 떠들고 상대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면서 평화통일을 하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 김정일체제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데서도 북한체제의 흔들림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황비서의 한국망명이
이루어진다는 시나리오 아래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을 정확히 분석하여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먼저 북한이 황비서의 한국망명에 따른 내부혼란을 호도하기 위해
모험주의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우리는 북한이 모험주의적 행동을 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안보태세를
강화하고 북한의 연착륙을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지난해 잠수함사건으로 경직되었던 남북한관계가 새해들어 북한의 공식
사과와 함께 우리기업의 대북투자, 경수로 건설, 식량지원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재 국내기업이 정부로부터 승인받아 추진하고 있는 대북투자 프로젝트는
10개에 달하고 있으며 북한 신포지역의 경수로건설을 위한 기술조사단파견도
22일 출발예정으로 있다.

또한 쌀지원 문제도 현재 인도적인 차원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비서사건은 새롭게 진행되는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에
상당기간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부는 그동안 대북 경제협력을 정치와 연계하는 "정경일치의
원칙"을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황비서 망명사건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즉 황비서 사건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철저히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함으로써 새해들어 활기를 찾고 있는 남북경협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북한간의 경제협력은 단순히 북한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선전이라든지, 남북한간의 산업구조 및 무역구조가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분업을 통해 상호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순수한 경제적 측면에서의
필요성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북경협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 경제
교류와 협력을 통해 그동안 단절되었던 남북대화를 재개하고,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함으로써 남북한간의 신뢰성과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정치와 연계하여 북한체제의 붕괴쪽으로 몰고가는
정부정책은 피해야 한다.

정부는 이번 사건과는 별개로 "정경분리의 원칙"하에 남북경협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대북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유엔이 주관하고 있는 대북 쌀지원에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

지난날 분단된 독일이 정치적으로는 분단과 냉전이 고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은 연평균 2백억 마르크(약 9조원)에 달하는 상호물자교류를
해 왔으며, 서독은 의도적으로 동독의 경제를 돕기 위해 수입초과정책을
써왔다.

또한 1982년 동독이 서방국가들로부터 "외채상환불능 국가"로 평가되자
서독은 동독에 대한 차관보증자로 나섰으며 20억 마르크규모의 차관을 공여
함으로써 동독경제의 회생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서독이 동독에 제공한 경제적
순혜택은 약 40억 마르크로서 이는 동독 GNP의 3%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물론 독일의 모델이 한반도의 통일모델일 수는 없다.

통일전 독일의 정치 경제적 환경이 우리와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황비서 망명사건과 관련하여 우리는 독일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즉 북한의 경제를 정치와 연계하여 계속 곤경으로 몰고 가면 더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번 황비서 망명사건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북한체제의 연착륙을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강구해야 하며 사회분위기나 여론에 치중한 정책수립은
가급적 지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남북경제협력이 북한의 체제에는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북한경제에는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북한에 인식시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비서의
망명사건과 관련하여 북한쪽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