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수사는 미봉으로 막을 내렸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은 관련이 없다"고 중수부장은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부도는 난 것이지 낸 것이 아니다"(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는 말이 거듭
강조된 다음이었다.

과연 모든 것은 은행들만의 책임이며 부도 과정에도 정부의 개입은 없었던
것일까.

6조원의 한보호가 침몰했던 그날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1월23일 오후 7시35분, 제일은행 본점 행장실.

"정총회장이 경영권 포기를 거절해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키로 했읍니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부도사실을 공표했다.

나란히 앉은 김시형 산은총재 우찬목 조흥은행장 장명선 외환은행장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신들의 자리도 함께 부도날 것이란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슬러 올라간 지난 1월5일 오후 3시55분.

신년하례회에 참석하는 인사들이 분주히 오르내리던 은행회관 엘리베이터안.

"(한보 때문에) 모임이 있었다면서요"라는 기자의 나지막한 질문에 모시중
은행장은 손가락 네개를 펴보였다.

"벌써 네번째야"

은행장들만이 만난 것으로 알려진 소위 "한보 대책회의"는 이미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번째 만남은 작년 12월 초순.

1주일여전인 11월25일 정총회장과 신제일은행장간에 불꽃을 튀겼던 문제의
담판(20일자 본보 참조)이 결렬된 직후였다.

""저쪽" 반응은 어떻습니까"

"뚜렷한 결론이 없습니다.

그저 "그래도 국가기간산업인데..."라는 원론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첫 만남은 은행장들의 "동병상련"을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직간접적인 만남이 연말까지 적어도 4번이나 계속됐고.

그중 2, 3번은 "저쪽"에서 직접 참석했다는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물론 청와대 등은 이런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때까지만해도 신사적으로 나가던 "대책회의"는 1월들어 험악한 분위기로
바뀌고 만다.

시중에 한보철강의 "법정관리 신청설" "부도설"이 횡행하던 1월8일.

역시 시내 모호텔.

"오늘 1천3백억원의 어음이 돌아온다.

지원이 없으면 끝이다"

"그래도 주거래은행이 책임져야지 우리까지 끌어들이면 되겠느냐"

신광식 제일은행장의 절규와 다른 은행장들의 버티기가 거듭됐다.

결국 1천2백억원의 협조융자로 어음을 막아주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은감원은 제일은행의 동일인 여신한도 초과를 특인해주는 등
중재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재경원 은감원 등도 초긴장상태였다.

"당진공장이 완공될 때까지 자금지원을 해주자는 청와대쪽 주장과 빨리
결론을 내는게 좋다는 재경원.은감원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고 한 시중은행장은 밝히고 있다.

1월17일께 드디어 결론이 내려졌다.

"정총회장을 한보경영에서 손을 떼게 한뒤 자금지원(은행관리)을 계속한다"

주식담보 추가제공을 요구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정회장은 막무가내였고 22일 오후 채권은행장들은 한보에 최후통첩을
했다.

"경영권 포기각서를 제출하든지, 부도를 택하라"

그리고 22일 밤.

제일은행의 여신총괄부 직원들은 본점 지하2층 다용도실에서 박석태 상무의
지휘아래 새벽2시까지 작업을 했다.

"은행관리결정 배경, 채권대표자회의 안건, 한보철강의 여신 현황및 향후
전망" 등.

정총회장이 경영권 포기각서를 제출하는 즉시 채권단 대표자회의를 소집,
은행관리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빗나갔다.

23일 오후 4시 채권단회의를 소집해놨지만 정회장은 "어찌된 일인지" 경영권
포기각서 제출을 완강히 거부했다.

당황해진 4명의 채권은행장들은 4시35분부터 긴급회동에 들어갔다.

오후 5시15분쯤 "한보 부도처리 확정"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식이 먼저 흘러 나온 곳은 청와대였다.

다시 10여일뒤 서울구치소.

신행장은 면회온 가족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했다.

"막상 부도까지 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

< 하영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