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2월8일 새벽,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밤을 꼬박 새운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은 홍진기 중앙일보회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전화를 걸었다.

"나 결심했어요.

이제 삼성은 누가 뭐래도 반도체사업을 밀고 갈테니 이를 내외에 공포해
주시오"

오늘날 한국의 중추산업이자 주력수출상품이 된 반도체산업은 이렇게
고뇌에 고뇌를 거듭한 끝에 그 서막을 예고했다.

노련한 경영승부사인 이회장이었지만 사실 그로서도 반도체사업에 대한
투자를 최종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지막 단안을 내릴땐 오쿠라호텔의 특실에서 며칠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만큼 반도체는 이전의 어떤 사업과도 다른, 모험과 결단을 필요로
했던것이다.

우선 천문학적 투자비와 최첨단기술을 필요로 한다.

라이프사이클마저 매우 짧다.

그래서 "사업"이 아니라 "도박"이라는 소리를 듣는게 바로 반도체사업이다.

이회장이 반도체 참여를 선언하자 주위에선 삼성이 마침내 망할 길로
접어들었다는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심지어 청와대까지 나서서 실패할 경우 국민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재고를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그러한 반도체사업의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게 없다.

기술경쟁은 더 치열해지며 첨단화되고 있다.

투자비규모도 더 커졌다.

반면 라이프사이클은 오히려 짧아졌다.

자연 반도체업체를 이끄는 경영인들은 그 어떤 업종의 경영인보다
치열한 국제기업전쟁의 선봉장이 될수밖에 없다.

반도체가 최대 수출품목으로 우리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
되자 그들은 이제 단순히 자기기업만을 생각할수도 없다.

국민경제를 이끄는 첨병이라는 생각에 늘 중압감에 사로잡혀야 한다.

지난해처럼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폭락해 수출볼륨이 줄고 무역적자의
주범으로 꼽힐땐 반도체경영인은 영락없는 죄인의 심정이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경영능력만 요구되는게 아니다.

첨단기술과 대규모투자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

치열한 국제경쟁에 필요한 국제감각도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들 반도체업체 경영인에게 그 무엇보다 어려운건 바로
투자결정이다.

메모리반도체 1개라인 건설에만 1조원가량이 든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LG반도체는 지난해 반도체부문에 각각 2조원이 넘는
투자를 했다.

이는 해당그룹 총투자액의 25~30%에 해당된다.

반도체가 잘되면 그룹을 먹여살리고 잘못되면 그룹이 휘청거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투자시기가 너무 빨라도 안되지만 너무 늦으면 선발업체에 열매를
다 빼앗긴다.

전형적인 타이밍산업인 셈이다.

공장착공 3년내지 5년전부터 투자대상지역을 검토하며 시장상황은
10년앞을 내다봐야 한다.

기술개발은 투자 못지않게 중요하다.

미리 개발해서 적기에 출하하면 천문학적 이익을 얻을수 있다.

반면 뒤늦게 개발된 제품은 쓰레기에 불과할뿐이다.

반도체 경영인들 대부분이 이공계출신인 것은 기술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경영자 한 두사람이 급변하는 첨단기술인 반도체의 모든 분야를
섭렵할수는 없는 일.

자연히 어떻게하면 국내외의 최우수두뇌를 유치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실행하는 두뇌사냥꾼도 되어야 한다.

반도체는 이제 한 업체의 기술력만으로는 절대우위를 점할수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따라서 업체들간의 기술제휴 공동투자등 전략적제휴가 빈번하다.

이들 경영인은 국제시황의 면밀한 체크와 대응뿐 아니라 외국업체와의
제휴에도 신경을 써야하는등 뛰어난 국제감각마저 갖춰야 한다.

두둑한 배짱에 냉철한 안목,그리고 국제감각까지 가진 팔방미인이
돼야하는 부담마저 안고 있는 셈이다.

< 김낙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4일자).